시조 나부(羅富)는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해 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함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여황(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정착하였는데, 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부(羅富)는 고려조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란 무관직(武官職)을 지냈다. 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中央軍)의 일부로서 궁성(宮城)의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는 부서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部署)의 책임자로서 품계는 정삼품(正三品)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 시조의 중국 행적은 사료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시대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나득규(羅得虬)를 1세조로 한다.
나주는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현(發羅縣)인데 신라(新羅)가 백제를 멸한지 27년만인 신문왕 5년에 발라현을 금산군이라 개칭하고 성을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그 후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 곳을 차지하였으나 후고구려의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시켜 해로로 금성을 공략하여 빼았고 나주로 고쳤으며, 고려 조에서도 그대로 나주로 불렀다.
고려 성종 14년에 나주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鎭海軍)이라 칭하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해양도는 나주, 광주, 정주. 승주. 구주. 담주. 낭주 등의 주현이다. 현종이 원년에 나주로 걸안(契丹)의 난을 피하였다가 귀환한 바 있어 9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나주 나씨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 초기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 초에 여황현이 폐현(廢縣)되고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1세조 나득규부터 4세 나수영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나수영이 5형제를 두었고, 5명이 모두 관계에 나갔으므로 이들을 중시조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등 5대파로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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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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