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이야기

 

역사

죽산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죽성대군=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태보(太保)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 지므로 죽주(竹州=현재竹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죽산(竹州=竹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시대 죽주(竹州)지역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안성시 지역을 말하며 고려시대 죽주박씨竹州朴氏는 현재, 죽산박씨竹山朴氏라 부른다. 죽산박씨 시조(박기오朴奇悟) 할아버지는 신라54대 경명왕이며 아버지는 경명왕의 넷째아들 죽성대군이다.

 

분파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파조:朴挻㽔박정유) 후손에서 죽산박씨 철성백파(파조:鐵城伯派박서朴犀. 음성박씨, 고성박씨, 철성박씨)로 분파되고, 충질공파忠質公派박정유 동생이 박정혁으로 소경공파少卿公派(파조:朴挺奕박정혁)가 된다.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파조:朴挻㽔박정유)와 후손 철성백파(박서朴犀, 음성박씨,고성박씨,철성박씨)를 제외하면, 죽산박씨 소경공파少卿公派(박정혁朴挺奕) 후손에서 아래와 같이 분파가 많이 발생한다. 문광공파(文匡公派), 태복경파(太僕卿派), 총제공파(摠制公派)로 갈라지고, 다시 문광공파에서 죽산군파(竹山君派) 박문보, 문충공파(文忠公派), 판서파(判書派) 박순, 제학파(提學派), 충현공파(忠顯公派) 등 5파로 나뉜다.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 박서(朴犀)의 현손(자) 박혁충(충질공파 朴奕忠)이 고려조정(朝廷)에서 이조전서(吏曹典書)와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박서(朴犀박서장군)의 행장(行狀)과 사적(事蹟)을 갖추어 고려 왕궁 조정(朝廷)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박서(朴犀)가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고 철성백(鐵城伯,철성은 현재 경남 고성)에 추봉되었으며, 박혁충(奕忠)에게도 철성(鐵城고성)을 세습(世襲)하게 하여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게 되자 후손들이 호국영웅 박서(朴犀)장군 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고성(철성)박씨(固城朴氏) 및 음성박씨(陰城朴氏)가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박정유)에서 분적 하였다. 박서(朴犀)는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로 왕궁에서 왕이 철성백(鐵城伯)에 추봉하므로 가문에서는 박서에서 철성백파鐵城伯派로 분파시키고 박서 후손들은 박서를 중심으로,,,,

박서의 아들 박채의 후손에게는 음성을 식읍으로 하사함으로써 음성박씨(陰城朴氏)가 철성백鐵城伯파(박서 장군)에서 분적하였다. 후에 고성(철성)박씨는 1839년(헌종임금5년) 왕궁 조정(朝廷)에 정문(呈文)하여 본관 복구관 윤허(允許)가 되어 다시 죽산박씨로 복구관(復舊貫) 되었다.

그러나, 현재, 가족관계부(호적)에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때 그대로의 본관 죽산박씨(충질공파)로 있는 사람도 있고, 죽산박씨로 복구관 하지 않아서 죽산박씨에서 분관된 고성박씨 음성박씨 철성박씨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 충질공파忠質公派 (박정유)
    • 철성백파(鐵城伯派) - 박서(고성박씨,철성박씨,음성박씨) 
  • 소경공파少卿公派 (박정혁)
    • 문광공파(文匡公派) - 박전지
      •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 박익
      • 문헌공파(文憲公派) - 박원형
      • 문정공파(文靖公派) - 박원정
      • 전서공파(典書公派) - 박언
      • 판관공파(判官公派) - 박인
      • 정랑공파(正郞公派) - 박첨
      • 사정공파(司正公派) - 박도
      • 교하공파(交河公派) - 박도
      • 직장공파(直長公派) - 박조
      • 별장공파(別將公派) - 박문질
      • 제학공파(提學公派) - 박승수
      • 충현공파(忠顯公派) - 박자량
    • 태복경파(太僕卿派) - 박의지
      • 목사공파(牧使公派) - 박현공
      • 총제공파(摠制公派) - 박덕공
    • 찬성공파(贊成公派) - 박훤
      • 찬성공파(贊成公派) - 박계형

 분파된 본관

고성(철성) 박씨[

        •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왕(임금) 또는 동궁(태자,세자)의 앞에서 글을 강의함. 문종 30년(1076). 동궁관東宮官의 .【태자빈객[賓客], 태자첨사[詹事]】녹봉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300석

  • 박빈(朴彬):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문하시중은 현재 국무총리이다. 박빈朴彬은 박씨 시조(박혁거세)의 29세손인 신라 경명왕 8대군 중 넷째 아들 죽성대군(박언립)의 13세손이며 박서朴犀장군의 증손자이다. 그의 증조부(증조할아버지)인 박서는 고려 고종 때 귀주병마사 겸 문하평장사로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침입할 때 귀주전투 싸움에서 국난극복 공을 세워 철성백에 봉해졌다.
  • 박서장군이 임금의 왕명(몽골과 전쟁을 멈추고 몽골에 항복할 것)을 거역하다.

몽골(몽고군)의 국가위협이 사라진 후에 임금이 박서장군 국난공적을 철성백 봉하여 죽산박씨(충질공파) 박서장군 후손은 왕명에 의하여 고성(철성)박씨 음성박씨로 분파하게 되였다. 세월이 흐른 후 고성박씨 음성박씨 일부가 임금에게 청원하여 다시 죽산박씨(충질공파)로 본관이 복구관 되었다 박빈朴彬의 손자인 경렬공敬烈公 박보로朴普老(박보노)는 우왕禑王 때 서북면 상원수에 재직중 수차례에 걸쳐 왜구를 격파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를 역임했다.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이 시중(侍中)을 죽이고 스스로 시중이 되려고 한다는 것으로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 때 최영(崔瑩)과 함께 그 일을 맡아 귀양갔던 양백연을 죽이고 그 여당을 죽이거나 귀양보내었다. 시호는 경렬(敬烈)이다. 1380(우왕6)졸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기록.

음성 박씨

  • 음성 박씨

죽산박씨(竹山朴氏시조:박기오)후손 → 죽산박씨 충질공파忠質公派(충질공파조:박정유)후손 → 죽산박씨 철성백파鐵城伯派(박서) →

음성박씨와 고성(철성)박씨이라 박서朴犀의 아들 중 한명인 박재의 후손들은 박서朴犀의 공에 의해 식읍받은 땅 중 음성을 받아서 음성박씨로 분파하였고 박서의 아들인 박실의 후손들은 고성(철성)을 받아 고성(철성鐵城)박씨로 분파하였다. 고성(철성)박씨는 1839년(헌종5)때에 조정(朝廷)에 정문(呈文)하여 왕이 윤허(允許)하여 다시 죽산박씨로 복구관(復舊貫) 되었는데, 일부는 고성(철성)박씨 그대로 호적에 본관을 유지하고 있는 가정도 있다. 고성(철성)박씨는 죽산박씨 충질공파(박정유)후손이므로 죽산박씨 충질공파 족보에 합본되어 출판되고 있다. 음성박씨도 죽산박씨 충질공파(박정유) 후손이므로 족보 합본을 협의하고 있다.

죽산박씨 후손에서 본관(고성박,철성박,음성박)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고려의 명장 죽산(竹山=竹州죽주)박씨 박서朴犀장군이 강감찬 서희 권율 이순신 같은 국난극복 영웅이므로 그 시대 왕이 박서朴犀장군 및 후손에게 음성백, 철성(고성)백 봉직의 관직을 하사 하므로 죽산박씨 충질공파 일부가 음성백파 철성백파 고성백파로 분파되어 죽산박씨에서 일부가 본관이 음성박씨 철성(고성)박씨 로 분관하게 되었다. 

평산(평주) 박씨

죽산박씨 후손이 평산(평주)박씨인 것은 평산박씨 종중에서 확인되어 평산(평주)박씨가 죽산박씨 후손임은 확인 되었으나 선대 조상의 이름이 유사하나 다름에 유의(박지윤의 아버지 할아버지)하여야 할 것이다. 죽산박씨 자료 고문서를 중심으로 차 후에 검증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죽산박씨 평산파(평산박씨)는 태조 왕건시대 및 이후에 국가 중요 요직을 관장하였으나, 광종에게 견제를 당하여 고려 태조(왕건)비(아내): 죽산박씨 평산파(평산박씨) 성무부인, 월경원부인, 몽량원부인 평산박씨 ...,2000년 인구조사 평산박씨 357가구 1,156명.. 2000년 인구조사 평주박씨 32가구 82명

 

죽산박씨가 국가에 큰 공을 세워 공신에게 주는 왕명에 의하여 죽산박씨 평산파가 평산박씨로 분적 하여 명문권세를 누렷으나.....???...후세 후손에서 권문을 찾아 원적 죽산박씨로 복구관.또는 평산박씨.평주박씨로 그대로 본관을 가진다.,..,죽산(죽성,죽주)박씨 후손인 평산박씨,평주박씨는 경명왕 왕실(신라는 저물어 왕건에게 서서히) 정통 명문거족이 고려 태조 왕건 창업 및 공을 많이 세우고 국가보위를 함으로서 왕이 봉작을 내리므로 죽산박씨에서 평산박씨 평주박씨//그리고..죽산박씨에서 분적한 평산(평주)박씨 거대한 권력이.,.,.고려4대 국왕 광종(光宗)때 박수경·박수문 형제의 평산 박씨 세력은 광종의 후견세력이었고, 평주의 호족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정종 사후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는데, 이들의 세력이 막강하였으므로 광종은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로 앉히려는 다른 호족들을 견제한다. 964년(광종 15) 광종의 즉위를 도왔으나 그의 정책에 반발하던 평주의 호족 사도 박수경(朴守卿)일가를 숙청한다. 박수경 가문에서 그에 대한 불만 여론이 터져나왔다. 광종은 바로 사도 박수경의 아들 승위(承位), 승경(承景), 승례(承禮) 형제를 투옥했다가 사형에 처하였고, 아들들의 투옥과 처형 소식을 접한 박수경 역시 그해 8월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여 몰락하였다. 박수경 가문을 숙청한 이유는 광종에 의한 호족억압정책에 대한 박수경 가문의 불만의 토로였다. 광종의 호족세력약화와 왕족숙청, 1차 2차 호족숙청.,[권력무ㅅ상, 시기질투,,견제..정변..등을 .맞이하여..평산박씨 후손이 줄어들므로..후손들이 원본관인 죽산박씨를 다시.,후손이 다시 권문세족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서 평산박씨 357가구 1,156명.. 평주박씨 32가구 82명으로 아주 적은 이유는 광종시대의 호족세력 숙청 변고 때문일 것이다.

면천 박씨

죽산박씨 박술(족보에 부르는 이름 기록됨. 일명 박술희. 술희야)과 면천박씨 박술희의 선대 조상의 관직은 유사하나 죽산박씨 박술은 박기오의 아들이자 박언립의 손자, 경명왕의 현손이고 면천박씨의 박술희은 박득의의 아들로 박기원의 손자, 박문현의 현손으로 서로 다른 박씨이다. 선대가 연결되는 부분은 박혁거세의 손자인 유리왕으로 유리왕의 첫째인 일성왕계로 이어진 것이 죽산박씨이고 유리왕의 둘째인 파사왕계로 이어진것이 면천박씨이다.

  • 면천박씨와 죽산박씨 후손인지는 고문서로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죽산박씨 족보 기록 박술=박술희 훈요십조.

죽산박씨 족보에는 박술(박술희)가 죽산박씨 시조(박기오) 아들로 등재 되어있다. 즉, 경명왕 손자이다. 죽산박씨는 왕실 후손이며 신라가 힘도없는 망하는 시점이므로 경영왕 아들 손자등이 후일을 도모하는 생존을 위하여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차 후에 신흥세력인 궁예 왕건 등등에게 귀여 하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기훤,견훤 궁예 왕건등은 신라가 망하는 시점이지만 기득권을 가진 신라의 왕족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고, 지역을 관장하도록 하였을 것 같다. 경명왕 장남은 신라 경주 옆 경남 밀성(밀양)에 안착한다. 2000년 인구조사 면천박씨 1241가구 3980명

죽산박씨 인구통계 통계청 2000년 통계

죽산(옛날,죽주)박씨(53,489명), 음성박씨(7094), 고성박씨(3911), 철성박씨(4),..,. 65,756명

  • 신라말기 시대 사항과 견휜 궁예 왕건.,.,경명왕 아들(왕자,대군)이 신라 왕을 계승하지 못하고.,.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각 지역에 뿔뿔히 흗어져 궁예 견훤 왕건에게,.,그리고 죽산박씨가 평산박씨 평주박씨 면천박씨?,.,.,시대가 어수선하니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상대 진영은 신라왕족 경명왕의 후손을 지방 호족세력으로 대우하고.. 대충 이렇게 추리하면 경명왕 이후 시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ㅣ.

경명왕 큰아들은 장손이므로 신라 경주 인근지역 밀성(경남 밀양)땅을 받고 밀양박씨..,,.넷째 아들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한양 인근지역 경기도 죽주=죽성=죽산(용인시,안산시) 땅을 태조 왕건 에게서 식읍으로 하사 받습니다.

  • 신라54대 경명왕 시대/ 박씨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 신라55대 경애왕 시대/ 박씨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져 있으나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결국 경애왕은 자살하였고 그의 이종 6촌 동생 김부가 경순왕으로 보위를 승계하였다.

  • 신라56대 경순왕 시대/ 김씨

신라의 제56대 군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이다. 성은 김(金)씨, 이름은 부(傅)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9년만에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줄 것을 결정하였고, 태조 왕건에게는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태조 왕건의 딸 2명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한편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 배경은 미상인데,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경명왕의 자녀들이 미성년자였는지 그가 화백 회의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 죽성대군(竹成大君) 교훈(敎訓) - 죽산박씨 시조(박기오)의 아버지(경명왕 넷째아들 죽성대군 박언립)가 내린 교훈이다.

명철(明哲). 청백(淸白). 강인(强靭). 능동(能動). 웅비(雄飛)

항렬표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기(基)

진(鎭)

구(求)

상(相)

열(烈)

재(在)

호(鎬)

홍(洪)

수(秀)

병(炳)

45세

46세

               

규(圭)

용(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