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거공(金巨公)은 경순왕의 후예로 초명(初名)이 '김자표'(金子彪)이다. 그는 고려때 서리(胥吏)와 내시(內侍)를 거쳐, 1142년(인종 20) 금(金)나라 동경(東京)을 다녀온 후 의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거쳐, 고려 의종(毅宗)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원성(原城)의 식읍(食邑)은을 받고 원성백(原城伯)의 봉작(封爵)되었다.[1] 이후 후손들이 원성(原城 : 원주)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8세손 김득우(金得雨)는 고려후기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손서(孫壻)이자 신수(申璲)의 사위이다. 고려 말 충주목사(忠州牧使)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10세손 김연지(金連枝)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이었으며, 시호가 대경공(戴敬公)이다.
14세손 김응남(金應南)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김응남의 종질(從姪) 김준룡(金俊龍)은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였으며 시호는 충양공(忠襄公)이다. 김준룡의 손자 김덕원(金德遠)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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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遇) |
봉(鳳) |
영(英) |
행(行) |
성(成) |
기(基) |
호(鎬) |
영(泳) |
식(植) |
병(炳)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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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培) |
종(鍾) |
연(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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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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