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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제2 왕자(王子)로, 학성(鶴城)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고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작(封爵) 되어 울산 김씨(蔚山 金氏) 시조가 되었다. 학성(鶴城)은 울산의 별호라 한다. 시조의 이름은 사기(史記)에 전하지 않으나 《하서 김인후 가장(家狀)》 · 《김씨 분관록》 · 《증보문헌비고》등에 언급되어 있다.[1][2]

문헌에 의하면 그는 935년 10월 부왕 경순왕(敬順王)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太子)를 따라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다.[3]

분파

장파(長派)

  • 파조 김달근(金達根) : 흥려군 김온의 장자, 수의부위(修義副尉)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신덕(金愼德. 1400-1458?) : 호 손암(遜庵), 장파조 김달근(金達根)의 중자(仲子), 장악원 주부, 송화현감, 노모 봉양 외직 청암찰방, 단종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돌아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킴, 저서 손암유고(遜菴遺稿), 장릉지(裝陵誌) 행적 올라 있음, 단종 절신, 영호남 사림들이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수노(金粹老. 1401-1458) : 호 복양재(復陽齋), 장파조 김달근의 손자, 의정부 녹사, 중부령을 거쳐 1457년(세조 3) 단종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단종 승하에 투신 자결. 단종 절신,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대명(金大鳴. 1536-1603) : 자는 성원(聲遠). 호 백암(白巖). 문정랑(文正郞), 1558년(명종 13) 생원 의금부 도사, 1570년(선조 3) 문과 장원 급제, 성균관 전적,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칭송 받음, 늙은 모친 봉양 위해 사천 현감, 1577년(선조 10) 예조정랑 서장관으로 명(明)에 가서 황제로부터 옥용연(玉龍硯:옥 벼루)과 묵화 병풍 하사 받음. 당쟁 심화로 외직 괴산·풍기·봉산 군수를 역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자제들과 후진 양성, 경남 하동군 두류산 묵계동에서 병든 몸을 수양하던 중 임진왜란 발발하자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그를 도소모장으로 삼으니, 고성(固城) 에서 의병들과 함께 왜적 토벌 공을 세움, 전란 후 소실되었던 향약을 복원, 마을 미풍 양속을 후세에 전하고자 강응태(姜應台), 정밀(鄭密), 정안(鄭安) 등이 정한 백야동안(白也洞案) 보수하고 직접 발문을 지음. 진주 대각서원(大覺書院) 배향되었다.
  • 김천록(金天祿. 0000?-1593) : 자(字) 성경(聖卿). 여주 판관 재직 때 임진왜란 발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최경희(崔慶會) 장군등과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 선무원종공신에 녹권, 사적이 호남창의록에 기록. 충신 정려가 내려짐.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에 정려비를 세움, 충절의 고장 광양의 표상이 됨, 1982년 국도 확장공사로 정려비는 출생지 광양시 황금동 금곡마을 입구로 이전하고,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 유당공원에 ‘정려이건사적비(旌閭移建事蹟碑)’를 세움.
  • 김광련(金光鍊. 1727-1809) : 자(字) 자정(子精), 호 입암(立巖),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 후손으로 경남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 출생함.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전(經典)을 배우고 지신(持身)의 자세를 익힘, 동문(同門) 사우(士友)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함. 만년에 경남 거제군(巨濟郡) 국사봉(國士峰) 아래에 정자를 짓고 독서와 심신수양에 매진함, 유고『입암유집(立巖遺集)』.

중파(仲派)

  • 파조 김달원(金達源) : 흥려군 김온의 중자(仲子), 충좌위(忠佐衛) 중령사정(中領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중파조 김달원의 현손(玄孫),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음.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출사,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 등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스승이었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의 원한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여 그 본분을 다했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1545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한양에 올라왔으나, 곧이어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벼슬길을 버렸다. 이후 몸을 추스린 그는 성리학 연구에 종신할 것을 마음에 두고 몰두하였는바,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잡아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이와 기는 혼합된 것이라 주장하며 이황의 이기일물설에 반대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 두루 정통했고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과 1,600여수의 시(詩)를 남겼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과 옥과 영귀서원 등에 주향 되고,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 김남중(金南重. 1570-1636) : 호(號) 취옹(醉翁). 하서 김인후(金麟厚) 손자, 관품이 선교랑(宣敎郞),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宗系辨誣) 공이 인정되어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추록(追錄)되고, 임진왜란 때 종군하였다.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의인(宜人) 행주 기씨(幸州 奇氏. 1569-1597) : 취옹((醉翁) 김남중(金南重) 부인, 고봉 기대승(奇大升)의 딸, 정유재란 때 왜놈들에게 잡히자 절개를 지키고자 잡힌 팔을 잘라 버리고 강물에 투수 입절, 전쟁 후 남편 김남중(金南重)이 잘린 팔 하나를 거둬 정성들여 맥동 원당 선산에 장사지냈는데 이를 일비장(一臂葬)이라 한다. 이후 조정에서 부인의 뜻을 기리고 귀감 되는 정려(旌閭)가 내려져다.
  • 김형지(金亨祉, 1621-1675) : 호(號) 맥촌(麥村). 우암 송시열・동춘당 송준길・현석 박세채・문곡 김수항등 여러 선비들과 교유. 선조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천양사업(闡揚事業)에 매진, 효행천거(孝行薦擧), 추은(推恩)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 김기하(金器夏, 1649-1701) : 호(號) 각재(覺齋). 우암 송시열과 문곡 김수항의 문인, 역사・의학・지리・천문 등에도 두루 능통함. 선조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학문 연구와 업적을 정리하는데 매진함, 율곡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 등의 거유(巨儒)·석학(碩學)들과 깊이 사귀었으며 그들의 칭송을 받음. 스승 송시열 제주도 귀양 중 한양으로 압송되다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자 인근 선비들을 모아 장례를 주관하고 스승을 기리는 서원을 정읍 모천(茅川)에 세움. 벼슬길에는 뜻이 없어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학행으로 이조판서 이세백의 천거를 받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각재유고(覺齋遺稿)가 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고, 장성군 서삼면 연호사(硯湖祠)에 배향되었다.
  • 김시서(金時瑞, 1652-1707) : 호(號) 자연당(自然堂). 조선 중기의 시인, 송시열의 문인, 학행으로 경양 찰방에 제수, 《강도(江都)》라 제(題)한 시는 숙종의 상찬을 받음, 순창 쌍치면에서 글을 읽으며 선조 하서 김인후가 3여 년 동안 강학했던 훈몽재(訓蒙齋)를 수리해 짓는 한 편, 그 옆에 초당(草堂) 자연당(自然堂)을 짓고 선조의 유업을 계승했다. 전북 순창 화산사(花山祠) · 어암서원(魚岩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희서(金羲瑞, 1675-1742) : 호(號) 환암(喚菴). 효종ㆍ영조때의 학자, 삼연 김창흡(金昌翕) 문하에서 수학, 학문이 독실하고 효도가 후순지행(厚純至行)하며 향리의 화목을 도모하여 그 명성이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일찍이 《격물치지설》과 《향약》에 관한 글을 저술하여 후학을 장진함으로써 풍속을 돈독히 하였으며, 문집으로 《환암유고(喚菴遺稿)》가 있다.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鶴林祠)에 배향되었다.
  • 김녹휴(金祿休, 1827-1899) : 자(字) 치경(穉敬). 호(號) 신호(莘湖). 1835년(헌종 1) 생원시에 합격, 조선 후기 호남 유학 거장 노사 기정진의 문하생, 1877년(고종 14) 학행으로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씀, 『심성이기(心性理氣)』에 대한 연구에 몰두함, 조성가・이응진・조의곤・김평묵 등과 교유, 문집으로 《신호집(莘湖集)》이 전하며, 장성군 진원면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익중(金翼中, 1851-1907) : 호는 녹동(鹿洞). 조선말 의병장. 하서 김인후 후손으로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에 격분 1907년 9월 장성 수록산(隨綠山. 일명 수련산)에서 성재 기삼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종사가 됨. 이후 장성·영광 등지에서 순사주재소, 일본인 상점, 일진회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고, 그해 9월 23일 전북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야습해온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북문루에서 전사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 전북 진안군 이산묘(駬山廟)에 배향되었다.

계파(季派)

  • 파조 김달지(金達枝) : 흥려군 김온의 계자(季子). 호분위(虎賁衛) 부사정(副司正). 세종대왕 내외족 육촌계원.
  • 김처리(金處离. 1403-1456) : 호 도암(鞱菴) 또는 남강(南岡). 계파조 김달지의 장자, 형제 생원 합격, 장례원 사평, 단종 퇴위에 사임하고 귀향, 세조가 사헌부 지평平 등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음, 관작을 쓰지 말라하고 유명(遺命)함, 단종 절신,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에 배향되었다.
  • 김응두(金應斗. 1492-1552) : 자(字) 자추(子樞). 호 서수헌(逝水軒). 계파조 김달지의 증손, 1522년(중종 17) 문과 급제, 승문원 정자, 문학이 뛰어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다녀와 복명 중종이 화상(畵像)을 특사, 이조정랑, 홍문관 교리, 부응교, 고부군수, 밀양․순천부사, 광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1550년(명종 5) 부모 봉양을 위해 귀향. 장성군 진원면 학림사(鶴林祠)에 배향되었다.
  • 김경수(金景壽. 1543-1621) : 자(字) 백형(伯亨). 호(號) 오천(鰲川). 백부(伯父) 김응두(金應斗)와 삼종형(三從兄) 하서 김인후(金麟厚) 문하에서 수학, 기효간·정운용·변이중 등과 학문 강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신남(信男) 및 두 아들 극후(克厚)·극순(克純), 기효간·윤진 등과 장성 남문(南門)에서 창의 맹주 추대. 도내 격문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여 승리. 1593년(선조 26) 두 아들 극후(克厚), 극순(克純)이 의병과 군량을 가지고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순절함.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병 모집 크게 활약. 이듬 해 그 공로로 군자감정에 승진. 1601(선조 34)년 영의정 윤승훈이 그의 충의를 조정에 천명하여 공조참판·의금부동지사·동지중추부사등에 제수되나 모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여생을 마침. 오천집(鰲川集) 2권, 장성군 중평리 회계사(晦溪祠)와 오산사(鰲山祠) 배향되었다.
  • 김신남(金信男. 1552-1598) : 자(字) 신재(信宰). 호(號) 오암(鰲巖).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운봉(雲峰)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참판에 추증됨. 장성군 모현리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 김진호(金鎭祜. 1847-1924) : 자(字) 사형(士衡). 호(號) 금초(金樵).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의정(義楨). 1876년(고종 13)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으로 대사간 윤구영․집의 윤상익 등과 복제변경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함. 이듬해 사간원 정언으로 다시 서용, 1886년(고종 23) 부수찬으로 승진, 교리·사복시정·사간을 역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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