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봉모(金鳳毛)는 세계(世系)가 신라(新羅) 왕실에서 나왔다.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다. 여진어(女眞語)와 한어(漢語)에 통달하여 매번 금(金)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여, 항상 동각(東閣)에 거처하였다. 고려 신종(神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가 죽으니 사흘 간 조회(朝會)를 멈추었으며, 시호(諡號)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1]
1887년 간행된 《김씨 분관록》에는 시조가 시랑(侍郞) 김봉모(金鳳毛)라 하는데, 이후 문헌인 《증보문헌비고》에는 시조가 규정(糾正) 김예(金芮)라 한다. 또 《조선씨족통보》에도 시조를 규정(糾正) 김예(金芮)라 하며, 일운(一云) 태자태보(太子太保) 정평공(靖平公) 김봉모(金鳳毛)의 아들 평장태학사(平章太學士) 문장공(文莊公) 김태서(金台瑞)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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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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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永) |
口희(喜) |
직(稷) |
口순(淳) |
락(洛) |
口진(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