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강원도 양구에서 카빈소총을 든 청년이 다방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인 사건.
1970년 9월 2일 정오경, 강원도 양구에 있는 소라다방에 부산 출신 박추수(27)가 카빈소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박씨는 총으로 위협하여 남자손님들을 다방에서 내몬 뒤, 레지인 권소영(29), 윤문강(25)과 여자 손님 김정숙(26), 박순옥(19)들을 주방에 감금하였다. 신고를 받은 군경이 급히 출동, 이종택 병장이 설득을 위해 다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총이 불을 뿜었고 이 병장은 즉사했다. 이 와중에 외출했었던 다방 주인 김소라(30)는 멋모르고 다방에 들어갔다가 혼비백산, 범인이 전화를 받는 사이 간신히 뛰쳐나왔다.
군경은 여러 차례 범인을 설득하려 하였지만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다할 요구사항조차 없었다. 기자들이 밖에서 범행동기를 묻자, '동기 따윈 없다! 다만 사회에 무조건 반항하고 싶을 따름이다!' 라고 외쳤다.
오후 6시 반 경 범인은 배가 고프다면서 인질들에게 우유 한 잔을 요구, 김 양과 박 양이 우유를 끓이는 척 하다가 화장실에 간다면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범인은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는 기자들에게 재떨이를 내던진 이외에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8시 경 인질 중 권 양이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자 돈 200원을 주면서 밖에 나가서 약과 담배를 사오도록 시켰다. 그러면서 돌아오지 않으면 남아있는 인질인 윤 양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권 양은 밖에 나오자마자 실신하여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9시 10분 경 박은 자수 권유 전화를 받자 총을 윤 양 가슴에 들이대면서 '이 여자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소리쳤다. 이때 윤 양은 범인을 열심히 달래며 진정시켰다.
9시 30분 경에는 친형인 박근식(33)과 전화 통화를 하였지만 수차례 자수를 권고했어도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6시경 범인은 윤 양에게 다시금 담배를 사오도록 시켰다. 윤 양은 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척 하다가 뒷문으로 탈출했다.
마지막 인질까지 잃은 범인은 집기를 내던지는 등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다.
8시 쯤 기자 몇 명이 범인에게 접근하였고, 그 중 부산 출신 기자가 '동향인끼리 이야기나 좀 하자'고 범인을 설득했다. 범인은 우선 담배를 얻어 피운 뒤 태연하게 기자들 앞에서 포즈까지 취해주었지만 총은 놓지 않고 있었기에 군경이 접근할 수 없었다. 범인은 다시 다방으로 돌아가 대치를 계속했다. 오후 4시 20분 경엔 잠복중인 경관에게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오후 6시 경, 박의 친구라고 하는 윤순호(33)가 도착, 창문으로 범인에게 음식물을 넣어주었다. 이어 8시 경에는 형수인 남상례(29)를 비롯한 가족들이 도착,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범인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때 형수가 범인을 직접 만나겠다고 하였지만 경찰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가족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여러 차례 형수와 만나고 싶다고 호소한 바 있기에, 이때 경찰이 가족과 만나게 해 주었더라면 일이 더 잘 해결되었을지 모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훗날 일었다.
어두워진 뒤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지프의 헤드라이트로 다방을 비추자 범인은 극도의 불안 증세에 빠져서 다방 안을 마구 서성거렸다.
11시 35분, 양구경찰서 구영일(34)경사가 아래층 빵집을 통해 다방 뒷문으로 몰래 잠입했다. 20여분간 동정을 살피던 도중 갑자기 여러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급히 주방에 숨은 구 경사는 30분 이상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홀 안으로 뛰어들었다. 범인은 앉은 자세로 죽어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쏘아 자살한 것이었다.
범인인 박추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1966년에 해병대를 제대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누나 집에 얹혀살다가 행선지를 알리지도 않고 집을 나갔다고.
한편 범행에 쓰인 카빈 소총은 군용 지프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범인에게 사살된 이종택 병장은 하사로 1계급이 추서되었다. 이 하사는 연세대학교 화공과를 다니던 중 67년에 입대하였고, 10월 제대를 앞둔 상태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