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5일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의 백합다방에서 한 남성이 들어와 여종업원 최모(47세)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다른 여종업원 이모(45세)에 상해를 입힌 뒤 돈을 들고 달아난 사건이다. 범행 동기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사건의 범인이 연쇄 살인 전과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걸로 큰 충격을 불러왔었다.
2007년 4월 15일 오전 8시 45분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의 한 건물 지하 1층 백합 다방은 영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직 개시를 한 것도 아닌데 한 30대 남자가 가게 안에 거칠게 들어왔다. 도둑으로 보이는 남성이 현금 3만원을 훔친 뒤 주머니에 넣고 있을때, 다방외부 청소를 마치고 들어오던 종업원 최모(47.여)씨가 남성을 맞닥뜨렸다.
최씨는 곧바로 "도둑이야!'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 방향으로 내달렸지만, 남자는 날카로운 등산용 칼로 최씨의 등을 찔렀다. 최씨가 쓰러지자 남성은 칼로 목을 갈라 확인 사살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변태성욕자였던 남자는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최씨의 시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씨(45.여)가 다방에 출근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계산대에 있어야 할 최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범인은 다시 칼을 휘둘러 배 부위를 찔렀다. 이씨는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범행은 발각되기전 까지 모두 20여분이 걸렸으며, 살인 직후 급히 달아나던 남성은 행인과 어깨를 부딪히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가 범인임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 직후 30대 후반 가량에 키 175cm, 스포츠형 머리, 검정테 안경의 모습으로 범인의 몽타주가 만들어졌다. 경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다방 살인현장에서 50여개의 증거물을 수집했다. 하지만 딱 부러지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범행 수법의 대범함과 잔인함 등으로 미뤄 우발적 살인이 아닌 원한 관계로 추정, 면식범 등 주변인물에서 단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건 찾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증거물은 오히려 현장 밖에서 나왔다. ‘이쯤에서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범인은 다방에서 500m 떨어진 도로변에 피 묻은 휴지를 버렸다. 1.5㎞ 더 떨어진 금강천변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점퍼가 발견됐다. 범인은 강을 따라 도주한 듯했다.
점퍼는 육안으로는 혈흔을 발견할 수 없었다. 흐르는 강물이 피의 흔적을 지운 듯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피 묻은 휴지와 점퍼에서 숨진 최씨의 것 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성의 DNA가 동시에 검출됐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주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의자의 DNA만 확보했을뿐 이것을 누구와 비교할지가 막막했다.
이런 가운데 국과원의 다른 실험실에서는 범인을 쫓는 새로운 분석이 한창이었다. 성(性) 염색체인 Y염색체를 이용해 범인의 성(姓)이 김씨인지 이씨인지 박씨인지를 가려내는 시도였다. Y염색체는 남성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유전된다. 우리나라처럼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는 사회에서는 Y염색체의 유전적 지표(STR)를 분석해 공통점을 찾는다면 범인의 성씨를 특정할 수 있다고 국과원은 판단했다.
국과원은 1차로 자체 보유하고 있던 동종 전과자 등 1000명의 Y염색체 STR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했다. 그 결과, 범인의 Y염색체 단상형이 오(吳)씨 성을 가진 2명과 일치했다. 국과원은 사건 현장 인근에 오씨 집성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차 분석에 들어갔다. 집성촌 주민 19명의 동의를 얻어 상피세포를 분석했다. 역시 Y염색체는 특정 부위에서 공통점을 나타냈다. 국과원은 결국 수사팀에 “용의자는 오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통고했다.
또, 결정적인 증거로 점퍼 안에선 크라비트 점안액도 있었다. 크라비트 점안액은 전문의약품으로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전국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다. 병원 기록을 추적하며 포위망을 좁혀간 결과 불특정다수인 점안액 구매자들 가운데서 용의선상 인물을 압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사건 50여일 만인 6월 4일 경찰은 경기 광명시에 숨어 있던 범인 오이균(35세)을 검거했다. 당시 경비 보안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범행 동기는 간단했다. "차비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 영등포로 갈 차비 3000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인에 살인 미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범행 전날, 오이균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의 아버지 묘소에 들렀다가 대전에서 집으로 갈 차를 기다리다 우연히 찾은 성인용 게임에 빠져 막차를 놓쳤고, 돈마저 떨어지자 신탄진 역에서 하룻 밤 노숙한 뒤 사건 당일 아침인 15일 차비를 구하기 위해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범행 현장은 지나치게 잔인했고, 오이균은 시체를 훼손하며 성욕까지 풀었다. 실제로, 그의 전과 기록을 조회한 경찰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겐 연쇄 살인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성년자인 그는 법의 보호를 받았고, 징역 15년만 살고 2005년에 만기 출소했다.
1989년, 충남 연기군 금남면의 한 마을에 살던 17살 오이균은 3명을 연쇄 살해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당시 미성년자에게 내릴 수 있었던 최대치였다.
1989년 1월 11일 오후 4시, 오이균은 한 야산에서 노모씨(69세, 여)를 강간해 흉기로 목을 찔러 살해한 다음 남면 속칭 원적불 다리 밑에 암매장했다. 같은해 5월 24일 저녁 7시, 남면 금강변 하천부지에서 밭일을 가던 심모씨(62세, 여)를 위협해 강간한 뒤 흉기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
오이균이 두명의 노파를 죽이고도 의심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나이 덕분이었다. 10대 소년이 노파를 강간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던 오이균은 평소에도 동네에서 예의 바르고 순한 청년이란 평가를 듣고 있었다.
그가 꼬리를 잡히게 된 것은 1989년 8월 12일이었다. 당일 오후 1시, 알고 지내던 7살 유모 양이 자기 집 앞에서 놀고 있는 걸 보자 유 양을 자전거에 태워 마을 뒷산으로 데려갔다. 유 양을 강간하려고 했으나, 유 양이 큰 소리로 울자 발각될 것을 우려한 오이균은 목을 졸라 살해한다. 산에서 내려온 오이균은 2시 30분에 다시 산으로 올라가 가져온 흉기로 시신의 온몸을 깊게 찌른 뒤 땅에 묻었다. 하지만 목격자가 나오면서 검거되었고, 다른 범행들도 추궁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하고 만다.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죄를 반성하는 점,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앓는 점이 고려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현재도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