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5월 18일, 부산광역시 사상구 출생. 제2의 정성현으로도 불리운다.
2010년 2월 말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행 살인 사건의 범인. 희생자 이모 양(13)의 시신이 물탱크 안에 유기된 채 발견되자 공개수배되었고, 그 뒤 1주일 만에 붙잡혔다. 검거 직후엔 경찰 조사과정에서 담배를 달라하거나 짜장면을 시켜달라 하는 등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김길태는 1977년 가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의 모 교회 앞에 버려져 있던 고아였는데, 당시 딸만 둘인 종손이었던 양아버지가 데려와 키웠다고 한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태라고 불렀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양부의 주변에 길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2명 있었는데 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그들과 닮으라고 길태라고 지었다. 사실상 김길태의 양부모님께선 어린 사이코패스를 입양한 셈이나 다름없다.
초등학교 시절 여느 아이처럼 활달하고 운동을 잘하던 김길태는 삼락중학교 재학 시절 때부터는 말수가 급격히 적어지고 어두운 구석이 늘었다. 양어머니는 "길태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난 어디서 왔어?'라고 가끔 묻곤 했다"고 했다. 그 뒤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어머니의 진술과는 달리 그의 판결문에 따르면, 김길태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1993년 부산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김길태는, 그해 10월까지 합해 총 40여일을 무단결석했다. 결국 고등학교는 1년 다니다 중퇴했다. 반면 운동엔 탁월했는데, 중2때 이후 체력장 등급은 1급 아니면 특급이었다. "몸이 민첩하고 빨랐다"고 교사들은 기억한다.
김길태는 1994년부터 절도혐의로 소년원에 드나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후에는 폭행, 절도, 구타 등 각종 범죄를 저질렀고, 그 뒤부터 김길태는 33년 인생의 1/3인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교도소 감방 안에서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가끔씩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기질을 보여, 7차례나 규율위반으로 독방에 수감되는 등 징계를 받았다.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특별 치료시설이 있는 진주교도소로 2년여 이감되기도 하였다.
1997년에는 성폭력 미수와 2001년 부녀자를 감금하고 성폭력하여 교도소에서 8년 동안 복역하고 2009년 6월에 출소했다. 그의 외삼촌은 "친구는 물론 친지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었다"며 "누나들과도 연락이 끊겨 조카들 얼굴도 한번 못봤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는 김길태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고등학교를 그만둔 그는, 덕포동 옥탑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옥상 난간에 기대 담배 피우는 모습만 가끔 눈에 띄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범죄가 누적되면서 마침내 아동 성폭행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양부가 사건 이후 밝힌 바로는 '그 놈(김길태)을 전국 방방곡곡 교도소에서 20년간 뒤치다꺼리 했다'고 한다. 또 '(김길태가 기억이 안난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교도소에서 거짓말만 배웠다', '(기자에게 물으며) 그 놈 아직 안 죽었느냐'고 발언한 것을 보면, 이번 일로 양부모에게도 외면당한 듯 하다.
김길태는 붙잡힌 후 경찰의 계속된 추궁 끝에 일부 성폭행 혐의는 인정했으나, 이모 양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것에 대해선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당신의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 "거짓말탐지기를 쓰겠다" 등의 말로 자백을 유도하여, 3월 14일 "술에 깨어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시체가 있었다"며 이모 양의 시체를 숨겼다고 자백했다. 15일 부검결과에 대해 알려준 후에는 "이모 양을 성폭행하고 입을 막아 살해했다"며 완전히 자백했다.
사실 검거 다음날부터 혐의 인정과는 별개로 이양에 대해선 미안하다는 말을 했으며, 자백할 때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진술에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다가 16일 상황 재연시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진행을 힘들게 하는 등 석연찮은 부분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선 감형을 위한 연기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
사건 초기 피해자가 중학생이라고 오보한 점, 조두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생한 아동 성폭행/살인 사건이라는 점 등 수상쩍은 부분들이 있기에 여러 음모론이 퍼지기도 했다. 음모론들의 신빙성을 떠나서 대한민국 경찰과 언론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게 만든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처벌 수위와 과정의 투명도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피해자는 중학생이 아닌 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2010년 6월 9일 사형을 구형받았고, 25일에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다가 다시 정상판정이 나기도 했다. 2심에서는 기소 내용 자체는 모두 인정했으나 형량을 깎아 무기징역을 선고했는데, 범행의 정도에 비해 1심의 형량은 너무 지나치다는 이유라고 한다. 그리고 10년 이상 징역을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대법원의 원칙에 따라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당연하지만 피해자 이 양의 부모는 큰 고통을 받고 있으며, 김길태의 양부모도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교도소에서도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 등, 아직 개과천선했다고 보기 힘든 것 같다.
트위터에 탈옥했다는 루머가 퍼지고 있다. 담당 교도관이 직접 김길태의 수감 여부를 확인한 결과 이는 거짓이라는 공식 발표가 났다. 현재도 흉악범이 주로 보내지는 경북북부 제1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어느 미친 놈들이 김길태 팬카페 설립이라는 최악의 사고를 터트렸다. 근데 미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찰스 맨슨의 경우 수많은 팬클럽이 있으며 심지어는 아예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것도 볼 수 있다. 문제의 카페 운영자들은 마치 수사본부의 프로파일러가 직접 발표한 양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또한 카페 내에서는 김길태 모에화, 피해자와의 커플링 팬아트 등 정신나간 짓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당연히 네티즌들은 격분했고, 김길태 팬카페에 대해 경찰 수사가 들어갔으며 해당 카페는 현재 강제 폐쇄된 상태이다.
조사 결과 카페 운영진 이씨와 김씨는 각각 대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였다고. 결국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등을 사유로 팬카페 운영진의 경찰서 정모가 이루어졌다 이후 팬카페 운영자 dogtrap은 자신의 블로그에 사과문을 올렸으나, 사실은 사과문을 가장한 세로반전, 내용은 "씨X구라다" 였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기에 비교적 강도 높은 수사가 이루어졌다. 대구 지하철 참사 방화범 김대한이나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나 강호순 때와 비교해보면 흉악범에 대한 경찰의 태도가 상당히 매서워졌다. 이례적으로 경찰이 신원을 숨기지 않고 얼굴을 공개한 채로 끌고 갔는데, 검거 당시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이걸 경찰이 압수하고 대중들에게 얼굴을 강제로 만천하에 공개한 것. 쉽게 말하면, 김길태도 중범죄자인 건 맞는데 상대적으로 더 심한 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에 비해서 경찰의 대우가 안 좋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김길태가 전과자이고 이 사건 외에 다른 성범죄의 피의자로 쫓기고 있는 상황에 추가로 저지른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해도 경찰의 이러한 대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배하는 행위로 볼수 있으며, 여기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김길태의 악질 행각의 영향인지 이 사태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으나, 결국 2010년 3월 15일 홈페이지에 경찰의 검거과정이 잘못되었다는 진정을 올리고 이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김길태 사건 이후 부산 일대에는 수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일단 부산지방경찰청장인 이강덕은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우범지대에 있는 치안센터를 파출소로 승격하여 한 파출소당 정원을 28명으로 늘렸다. 또 부산 전역에 있는 폐가들을 조사하여, 몇몇 지역은 이미 철거하고, 철거하지 않은 곳은 출입금지 팻말을 붙였다. 또 이런 지역을 특별방범구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인 덕포동도 예외는 아니라서, 주거환경 개선작업에 들어갔고,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벽화까지 그려져 결국 덕포 희망디딤돌 마을이 조성되었다. 증설된 CCTV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