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이야기

 

역사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명종 때에 무인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의 경인난(庚寅亂)에 이의방(李義方)에 의해 서경낭장(西京朗將)으로 발탁되었고, 1176년(고려 명종 6)에는 두경승(杜慶升)을 따라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한 골로가 인정되어 상장군(上將軍),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그 뒤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석린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태조(太祖) 이성계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다. 석양선의 손자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했다.

석수명의 동생 석여명(石汝明)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제학을 내려 주었음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석여명(汝明)의 아들 석문성(石文成, ? ∼ 1380년)은 1364년(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77년(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통진(通津)·동성(童城)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崔瑩)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항렬표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균(均)
원(源)

호(鎬)
상(相)

순(淳)
환(煥)

주(柱)
균(均)

정(鼎)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