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 | 경상남도 창녕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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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조계룡(曺繼龍) |
주요 중시조 | 조겸(曺謙) |
주요 인물 | 조익청, 조민수, 조상치, 조비형, 조효문, 조석문, 조숙기, 조위, 조신, 조계상, 조광원, 조식, 조호익, 조성환, 조만식, 조정환, 조봉암, 조재천, 조훈현, 조희연, 조재현, 조국, 조규현, 조규제 |
인구(2015년) | 366,798명 |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경상남도 창녕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창녕조씨 시조(始祖) 조계룡(曺繼龍)의 득성설화지(得姓說話址)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이다.
창녕조씨 일각에서 조계룡이 신라(新羅)의 선덕여왕인 김덕만(金德曼)과 결혼했다고 하지만 《화랑세기(花郞世記)》에 김덕만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 김용춘(金龍春), 을제(乙祭)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갈문왕(葛文王)인 음(飮)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김덕만은 김인평(金仁平)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4년 윤창현이 저술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조계룡의 아버지는 옥결이고 어머니는 예향이라는 것은 설화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玉訣)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626년(진평왕48년)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붉게 씌여져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확인해 보니 조(曺)자가 선명하므로 성을 조(曺)라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하도록 하니 창녕 조씨의 시조이다.
중시조(中始祖)는 조겸(曺謙)이다. 신라 아한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의 아들인 조겸은 태악서승(太樂署丞)이라는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1]
《창녕조씨 만가보(昌寧曺氏萬家譜)》에 의하면, 조겸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15세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11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기 조민수(曺敏修)가 문하시중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조민수의 아우 조경수(曺敬修)의 손자인 조석문(曺錫文)은 영의정에 올랐다. 조석문의 조카 조위(曺偉)는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서예에도 뛰어나고 문집 《매계집(梅溪集)》을 남겼다. 조위의 서형(庶兄) 조신(曺伸)은 역관(譯官)이었고, 조위의 현손 조효창(孝昌)은 숙종 때 시 서·화의 삼절(三絶)로 불렸다.
조선 중기의 석학인 조식(曺植)이 《남명집(南冥集)》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을 저술하였고, 그의 문하에서는 김효원(金孝元)·정인홍(鄭仁弘)·정탁(鄭琢)·최영경(崔永慶)·곽재우(郭再祐)와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다른 파계(派系)인 조상치(曺尙治)의 후손에서는 중종 때 우참찬을 지낸 조계상(曺繼商), 인조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조문수(曺文秀), 현종 때 예조참판을 역임한 조한영(曺漢英),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조하망(曺夏望), 영조 때 이조참판·예문관제학을 지낸 조명교(曺命敎),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조윤형(曺允亨) 등이 있다.
그밖에 연산군 때 대사헌을 지내고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던 조숙기(曺淑沂), 중종 때의 무신으로 왜구와 야인 토벌에 공을 세워 병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한 조윤손(曺潤孫), 중종반정 공신 조계형(曺繼衡), 시·서예·음악에 뛰어났던 조우인(曺友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