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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little Raiders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4월 18일 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항공 중령이 이끌었던 특공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실행되어 일본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빠르게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프랭클린D. 루즈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을 빨리 시행하라고 육해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이는 감정적인 복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당시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선 군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작게라도 일본에게 통렬한 반격에 성공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미합중국 해군 태평양 함대에 가용 가능한 전함이 한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 순양함 이하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군항공대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 항공모함을 엄청나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실패할 확률이 많지만, 육군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을 낸 사람은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의 잠수함 참모인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 대령이었다.

문제는 육군의 폭격기들은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한 번 이함 후 비행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 후 귀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귀환 지역은 중국으로 선정되었고 사전에 중화민국 정부와 협상을 해서 귀환 루트를 확보해두었다.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 (조종사), 리차드 E. 콜  중위 (부조종사), 뒷줄 왼쪽부터 헨리 A. 포터 중위 (항법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폭격수), 파울 J. 레오나르드 중사 ( 항공기관사 )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고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슈나이더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제임스 둘리틀 육군 항공중령이 선발되었다.

참고로 슈나이더컵 대회는 항공기의 최고 속도를 겨루는 대회로 엄청난 항공기술의 혁신으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A6M 등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당시는 수상기가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수상기 경주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열렸으며,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면 비행기 조종에 대해서는 최고급 전문가로 통하던 시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슈나이더컵을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가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을 모델로 하고 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착륙 후 몰고 온 폭격기 전량을 랜드리스로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전투에 승리하면서 일차적으로 나치 독일의 공세를 막는데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스탈린반격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전선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일본 제국 본토를 공격한 미군 폭격기를 넘겨받을 경우 자극받은 일본 제국이 소련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고,결국 중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화민국 수도 충칭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후술할 조기발각 문제 때문에 연료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논밭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육군 최고의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B-25는 본래 육상에서 운용하기 위해 개발된 육군의 폭격기였으므로 활주거리가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함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길면서도 간신히 항공모함에서 이함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해당 폭격기가 선정된 것이다. 기체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에 무전기도 빼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빼버렸다.

대신 적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 같은 것으로 기총좌 자리에 가짜 기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당하거나 포획당할 경우 당시로서는 고급 기술인 노든 폭격조준기가 일본에 노획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간이형 폭격조준기가 달렸다. 이러면 당연히 명중율은 떨어지지만, 이번 작전은 단지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일종의 심리전이었기 때문에, 딱히 폭격 정밀도가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심리전이란 측면에서 정훈 목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폭격기 중 2대엔 공습 장면을 촬영할 카메라를 탑재했다.

이렇게 극한으로 무게를 줄이고, 그 기체들을 육상에서 항공모함 갑판과 같은 길이에 선을 그어 둔 활주로에서 이함을 맹연습한 육군 조종사들이 이착륙 실습을 전원 성공시킨 뒤, 특공대는 미 해군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USS 호넷 함에 도착했다.

그리고 B-25를 채우느라 해군 함재기를 전부 빼버려 자체 방호 능력이 없는 호넷의 엄호를 위해 모여든 함대에 마지막으로 동급함인 USS 엔터프라이즈 함이 합류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은 해군 소장 윌리엄 홀시 제독이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은 호넷 함의 엄호 외에도 일본 해군이 어선들을 징발, 선원들 외에 해군 하사관 1명과 무전기 1대를 배치해 연안 감시 임무를 맡긴 연안경비정들을 일본 본토에 경보하기 전에 요격하는 임무도 함대의 순양함, 구축함들과 함께 수행했다.

 

 

둘리틀 특공대 작전 중 경순양함 내쉬빌의 포격에 격침당하는 일본군 위장감시선 니토마루-23. 1942년 4월 18일 새벽.

4월 18일 아침 7시 38분,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경비정 니토마루를 발견한다. 경비정 자체는 경순양함 USS 내쉬빌 함이 함포로 쉽게 격침시켰지만, 격침당하기 전에 니토마루가 암호로 일본에 긴급무전을 보낸 것이 포착되었으므로 이미 미 함대의 존재는 발각되었다.

결국 아침 08시 20분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310km 더 먼 35°N 154°E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출격하게 되었다. 일본까지 1,200km를 날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호넷의 비행갑판을 뒤덮은 폭격기들 

여기에다 항모에서 이함하는 것은 단발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들한테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특공대원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함을 시도해야 했다.

그리고 둘리툴 중령이 탑승한 1번기는 다른 B-25를 주기하느라 다른 대원들보다 이함 거리가 더욱 짧았다. 따라서 1번기는 거의 추락하기 직전까지 기수가 낮아졌지만 이함에 성공했다.

그 뒤를 따라서 2번기, 3번기가 연달아 출격했고 결국 모든 특공대원이 호넷 승조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무사히 이함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했다.

 

작전 중 폭격기에서 촬영된 사진

한편 일본 해군은 니토마루로부터 받은 무전을 통해 미 항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위한 준비를 개시한다.

다만 이것을 항속거리가 짧은 일반적인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공습은 항모가 좀 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해 즉각 요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B-25는 이미 이함을 개시했고 미 함대는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작전의 실체를 알았더라면 호위 전투기도 없고 빈약한 무장을 지녔던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요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판단보다 20시간 쯤 빨리 B-25 편대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 육군 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폭격기의 고도가 묘하게 높은데다, 암만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 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했으면서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어떤 부대는 "국적 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일본 육해군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 통화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육군항공대가 운용하는 1식 육공 G4M으로 오인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어찌됐든 상식적으로 육상에서 발진하는 미 육군 폭격기가 일본 본토에 나타날 리는 없었기에, 이런 대응 자체는 딱히 몰상식하다 볼 순 없었다.

추가로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탓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진 덕분에 그런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게다가 그 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도 일본 비행기인 줄 알았던(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일본인들은 그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서야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 육군이 허겁지겁 Ki-45와 당시 실험기이던 Ki-61 전투기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 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일본 육군기를 세 대나 격추한다.

 

둘리툴 특공대의 공습으로 파괴된  공장  잔해

물론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한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 동, 개장중이던 해군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크진 않았다.

다만 류호의 취역 지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항모와 항공대 전력을 보충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전과가 아니라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어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실제 심리적인 효과는 진주만 공습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러 언론이 이렇게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일본군이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덴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진짜로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다.

또한 이 사건 때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한다.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를 계기로 방공도시계획을 진행시키고 대폭격기 요격부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오히려 미 해군을 상대할 귀중한 전력이 둘로 분산되어 버려 미드웨이에서 절반이 깨지고, 웨이크, 펠렐루에우, 오키나와에서 차례차례 깨지며 일본의 항공 전력의 숙련도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둘리틀과 그의 대원들이 "샹그릴라에서 날라 올랐다." 라고 표현했다.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는 전설속의 이상향이다. 작전에 사용된 호넷 함을 숨김으로서 보안 유지 및 공습에 신비감과 낭만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의도로 사용한 듯하다.

그런데 기자들은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 함에서 날아 올랐다라고 오보를 냈는데, 이를 재미있게 생각한 해군이 나중에 정말 USS 샹그릴라 함을 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중 69명이 생환했다.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출격 몇달 전에나 진급했던 것임에도 이 작전의 성과로 인해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바로 준장으로 진급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소령에서 준장까지 같은 해 안에 달성한, 기절초풍할 진급이었다.

리고 1896년생인 둘리틀 중령은 1993년에 사망할 때까지 엄청나게 장수했다. 둘리틀의 최종계급은 끝까지 다 올라갔다. 

휘하 장교들도 꽤 순조롭게 진급했는데, 데이비드 M.존스 대위 소장까지, 테드 W. 라우슨 중위 소령까지, 윌리엄 M 바우어 중위 대령까지 각각 올라갔다.

 

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중인 14번기 승무원들

 

돌아오지 못한 11명 중 3명은 전사했고, 포로가 된 8명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라 하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덴노와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 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베이징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 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포로의 시신은 화장 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됐다.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승무원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측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그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상당히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대륙과 대만 모두에게서 나온다.

공습에 참가한 80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 총 16대의 공습기를 운용하였고 이 중 10대는 도쿄, 2대는 요코하마, 1대는 요코스카, 2대는 나고야, 1대는 고베를 타격했다. 이 중 윌리엄 팔로우 중위가 이끄는 나고야 타격기의 승무원이 전원 상하이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으며 딘 홀마크 대위가 이끄는 도쿄 타격기의 승무원도 윈저우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되었다. 이 기체 승무원 10명 중 2명이 익사했다.

  • 1명은 불시착하던 비행기에서 탈출하다 사망.

  • 2명은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익사.

  • 에드워크 요크 대위가 이끄는 5명은 그들이 탄 도쿄 타격 8호기가 소련영토에 착륙. 기체는 압수당하고, 5명은 억류자 수용소행. 13개월 후에 명목상 탈출하여 이란으로 망명 성공함.(사실상 석방)
    미국과 소련이 당시에는 동맹국이었지만 소련과 일본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억류자로 분류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이란의 억류자 수용소로 이송한 후에 거기서 이란 주둔 영국 육군 주둔지 근처에서 풀어준 것. 비행사들은 걸어서 영국 점령지대로 돌아가면 되었다. 그러면 서류상으로는 억류자 5명 수용소에서 탈출로 처리. 소련에서 잡혔는데 왜 이란인가 하면 랜드리스 물자의 이동 문제로 이란을 영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던 시기였다. 즉 영국령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까운 이란으로 이송한 것이다. 둘리틀 특공대 외에도 기체 이상이나 항로를 잃거나 피격 등으로 인해 소련 극동 지역에 불시착한 미군 항공기 승무원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소련 측에서 '망명'했다. 단, 승무원들이 '망명'한 것과는 별개로 항공기 자체들은 소련이 압수해서 연구용으로 잘 써먹었다. 자세한 내용은 

  • 8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들 중 3명은 총살. 5명은 포로수용소행. 그중 1명은 병으로 사망. 나머지는 종전때까지 수감.

  • 64명은 중국인들로 인해 보호받고 생존. 중국인 대부분은 일반인들.

  • 살아남은 공습 대원중 4명은 나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다른 13명은 2차대전중 전사.

  • 공습 대원중 2019년 현재 리처드 딕 콜 예비역 중령이 생존해 있다. 위의 사진에서 둘리틀이 탄 비행기에 같이 탄 승무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2019년 4월 9일, 콜 중령이 사망하여 이제 둘리틀 특공대는 완전히 전설로 남게 되었다.


또 다른 상징적인 조치로, 프랭크 녹스 당시 해군장관의 요청으로 폭탄 중 초탄에 1908년 미 해군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훈장을 매달아 같이 떨어트렸다.

2016년, 미 공군은 B-2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텔스 전략폭격기 B-21에 Raider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둘리틀 특공대에서 따온 명명이라고 밝혔다.

육해군이 합동으로 작전해 성공적으로 끝냈고, 해군 장병들도 열심히 도왔으나, 두리틀 장군은 전후 B-36 폭격기를 옹호하면서 해군을 디스하는 바람에 해군 내에 있던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다 날려먹는다.

 

2019년 4월 9일, 마지막 생존자였던 리처드 콜이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나며 둘리틀 특공대 비행사들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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