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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20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골동품상 "금당"의 주인 부부와 운전기사가 일면식도 없던 박철웅(당시 38세)에게 순차적으로 납치, 살해된 사건이다.

 피해자 정모씨 부부

 

범인 박철웅은 생산업체를 운영하던 중 사업이 여의치 않아 사채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에 진공소제기 총판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사채도 갚기 위해 필요한 자금 5천만원을 구하기 위해 고심중이었다. 사업자금을 구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고 판단한 그는 납치 및 몸값요구로 가닥을 잡고 대검같은 흉기를 사놓는 등 치밀히 준비했다. 

금당의 사장인 정 모씨를 납치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 인사동 골동품거리를 배회하다가 '금당' 이라는 상호를 보고는 '저 정도 규모의 골동품상이면 큰 돈을 조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고, 전화번호부를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내 금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곧장 사장을 바꾸라 한 후 '희귀한 이조백자와 족자 등 싯가 3억원에 상당하는 골동품이 있는데 이를 팔고싶다'고 하자 정 모 사장은 매우 흥미로워 하며 '물건을 직접 보고 구매하고 싶다.'고 했고 박철웅은 그를 만나 '물건'을 보여주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물건은 없었고, 정 모씨도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끼고 빠져나오려던 찰나, 박철웅이 미리 준비한 대검으로 정 모씨를 위협해 의자에 앉혀 묶은 다음 현금동원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 모씨는 박철웅이 원하는 수준의 현금은 준비할 능력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정 모씨는 박철웅에게 '살다보면 사업이 어려워 이런 일도 할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부인을 시켜 조금이라도 돈을 준비시키겠다. 걱정말라. 신고하지 않겠다.' 정도의 말을 수없이 하면서 박철웅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진귀한 물건을 사야하니 돈 500만원을 준비해 약속장소로 오면 사람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한 후 풀어달라고 사정했지만 박철웅은 이를 거부하고 무자비하게 목을 졸라 정 모씨를 살해했다. 

박철웅은 곧장 약속장소로 가서 정 모씨의 부인 김 모씨와 운전기사를 데리고 본인의 집으로 갔다. 김씨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묶여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고 '아이가 넷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김씨도 목을 졸라 죽였다.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 이 모씨에게는 '들어와 차라도 한잔 하라'며 유인해 이 모씨마저 확인사살했다. 

살해 후 시신을 작은 방 벽장에 유기하고 벽장 문은 철사로 옭아 매 두었는데, 이 철사를 수상하게 여긴 박철웅의 동생 박 모가 이를 뜯어내고 벽장을 열었다. 안의 시신을 보고 경악한 그에게 박철웅은 사건전모를 알렸다. 

집 안에 시신이 유기된 것을 박철웅의 부인인 김 모씨도 알게되었고, 이날 밤 서둘러 집 마당을 파고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유기장소 위에 조경수를 심어 철저히 위장했다. 

수사는 난항이었다. 지금처럼 cctv가 곳곳에 깔려있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 모씨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행적을 알 만한 부인과 운전기사가 함께 실종이었으니 난항일수 밖에 없었다. 

경찰은 금당이 골동품상이었음에 주목해, 불법/탈법적인 골동품 매매 또는 유통 과정에서 원한을 샀을 것으로 보고, 인사동 골목은 그야말로 들쑤셔버렸다. 금당사건을 수사하면서 밝혀진 별건의 죄목으로 기소와 처벌이 난무했고 자살한 골동품업자도 있었다. 

경찰 수사가 이리 난항을 겪던 중, 인천에서 이상한 첩보가 포착되었다. 내용은 '사위가 기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 는 것. 수사팀 입장에선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겠으나 워낙 사건이 미궁이다보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첩보도 수사하게 된다. 놀라운 건 이 말을 내뱉은 이가 박철웅과 사실혼 관계이던 김 모씨의 아버지였던 것. 

경찰은 박철웅 집 앞에서 잠복하며 수상한 점을 찾으려 했으나 별다른 점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금당 부부가 사라진지 너무 오래되었고 상부의 압력도 대단해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경찰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귀가하던 박철웅과 김 모씨를 별다른 근거없이 임의동행 형태로 서로 데려왔고 이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금당사건과의 연관성을 물었는데 이게 적중해서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추후 박철웅의 집 앞마당에 새로 심은 조경수를 파헤쳐 금당상회 부부와 그 운전기사의 시신 3구를 발굴해 냈다. 

 

당시 사건 기사와 본인 수기에 기초하면

박철웅은 1942년 부산에서 3남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육업에 종사하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이며, 형은 선원, 본인은 모 대학 연극영화과 2학년 중퇴, 사건에서 시신매장에 가담한 남동생은 부산 D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고교 미술교사를 했던 바 있다. 

2019년 현재도 자녀를 예체능으로 진학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는 것이 현실인 만큼, 박철웅의 가정은 경제적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본인의 수기에서도 유복한 가정임을 인정했다. 

박철웅은 대학 재학 시절, 친구가 소지한 셰익스피어 전집을 훔쳐 퇴학을 당했고 절도혐의로 징역 6개월을 살았다. 이후 군에 입대, 제대한 후 화장품회사에 취업했으나 급여가 밀리자 회사 물품을 훔치는 절도죄를 저질러 또 1년을 복역했다. 

출소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서 꽤나 돈을 모은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카지노나 나이트클럽에서 유흥비로 탕진했다. 박철웅은 부인과 아들도 있었지만, 다른 여성들과 꾸준히 불륜관계를 맺어왔다. 결국 박철웅은 본처와 이혼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업도 파탄나 있었지만, 헤픈 씀씀이는 어쩔 수 없었던지 동거녀와 함께 본인의 집에서 비밀요정을 운영하는 등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이후에도 클럽이나 술집의 종업원과 주로 동거하던 그는, 묘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현직 고교 교사인 H씨인데 그녀는 이혼 후 홀로 딸을 키우고 있던 여성이었다. 
이 여성과 동거하던 시절, 박철웅은 사업을 정리하고 보험회사의 외판원으로 취업했다. 이전과는 180도 다른 극강의 성실함을 보여주며 단숨에 외판실적 1위에 올랐다. 외판방법에 대한 강사로 초빙되기까지 했다. 수기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H씨와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H씨는 박철웅과 함께한지 1년만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떴다. 박철웅은 이때 너무 충격을 받고 폐인 직전에 이르렀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지만 마음은 예전의 방탕하고 사치한 모습으로 회귀해 버리고 만다. 그 후 결과는 납치살해로 이어졌다. 

 

 피의자 박철웅 형제와 내연녀 김모씨

  • 공범 박 모

박철웅의 친동생이다. 부산 모 대학 미술학과 출신이며 고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예술에 전념하여 성공하기 위해 교편을 놓고 서울로 올라왔다. 
실제 살해에는 가담하지 않고 사체 암매장에만 관여한 것으로 주장했다. 
처음 시신들이 유기된 벽장을 열고 시신을 발견했을 때 박철웅에게 자수를 권유하며 울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차라리 자살하라고까지도 했지만 그래도 친 형인지라 이도저도 못한 듯. 
조사에서는 살해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현장검증 시에는 또 이를 부인하고 사체 암매장에만 관여했다고 주장하였다. 

  • 공범 김 모 여인

박철웅의 동거녀. 나이트클럽 종업원으로 있다가 박철웅과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친정에서도 박철웅을 사위로 인정할 정도로 식만 올리지 않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사체 암매장과 기타 증거인멸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조사

범행일체를 자백받은 경찰은 시신발굴에 착수했다. 박철웅은 본인의 집 마당에 시신을 묻고 조경수를 심은 뒤 개집까지 사서 놓았다. 암매장 장소 옆의 방들은 세를 내준 상태였고, 그 중 한 곳은 사건 이후에 세를 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세를 들어온 남성은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을 조사하고 자신에게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는지 묻자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지 바로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시신을 암매장한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피해자들의 유류품(목걸이, 옷가지, 통장 등등)도 발굴해 냈다. 

박철웅은 조사과정에서 3명 모두 죽일 이유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완전범죄를 위해선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애초 범행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었다고도 했다. 또한 동거녀인 김 모 여인이 친정에 가서말한 내용이 단서가 되어 잡혔다는 것을 알았는지 '동거녀도 거동이 수상해 죽이려 했는데 못죽였다'는 엽기적인 발언까지 내뱉았다. 
박철웅은 처음에는 납치부터 살해까지는 혼자 한 일이고, 시신처리만 공범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또 같이 죽였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서너차례 진술을 번복하여 경찰을 당혹하게 했다. 
동생과 동거녀가 수없이 자수를 권유했으나 거절했고 그런 말 하지말라고 동생을 폭행하기도 했다.(..) 거절 이유는 '부모님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수를 안하려고 했단다.

  • 재판

당시 사건의 충격이나 여파만 봐도 능히 짐작이 가능하지만, 박철웅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사건발생 약 16개월만인 80년 10월 14일 대법원이 사형선고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1982년 7월 22일 처형되었다. 

동생 박 모는 살해에도 일부 가담했지만 형의 강요가 있었음을 감안해 무기징역을, 김 모 여인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82년 출소하였다. 동생 박 모는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항고했지만 대법원이  끝내 기각하고 무기징역 확정. 사실 두 공범이 살해 사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된다. 방 안에서 사람 묶어놓고 죽이고 있는데 두 사람은 바로 옆 거실에 있었다고 했다. 70년대 주택에서 이런 소리를 못 들었다는 건 말이 안된다. 또 후일 박철웅 수기에는 운전기사를 묶어놨을 때 '저 사람만은 살려보내자'며 동생이 울었다는 대목이 있는 걸 보면 뭐 말 다했다.

  • 이 사건에서도 검찰과 경찰은 ‘반인권 수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박철웅과 공범들에게 고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긴 하지만, 골동품업계를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상술한 대로 수사에 집중하던 세 달 동안 골동품 중개상 등 3천4백 명이 검찰조사를 받았으며 서울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 거래가 모두 멈추게 되었다.. 조사를 받던 골동품 중개상 중 1백15명이 용의자로 조사받다 다른 건으로 입건됐고 그 중 76명은 구속됐다. 한 중개상은 조사 도중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진범이 검거되어 사건이 종료된 뒤 서울시경국장은 용의자로 몰렸던 골동품상과 중개상, 골동품 수집자 등 2천명에게 사과편지를 보냈다.
  • 그는 처형되기 전, 2년 6개월 동안 볼펜 심지만으로 휴지에 써내려간 옥중 참회록인 <내 목에 밧줄이 걸리기 전에>를 냈다. 이후 이 책을 재판하면서 책 제목을 나는 사형수로 바꾸었다. 박철웅은 수감 중 기독교에 열렬히 귀의하였고 교도소 내 전도사를 자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참회록(전술에서는 수기)의 내용은 거의 신앙간증문에 가깝고 살인 당시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도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출간 당시 논란도 많았던 모양이다. '박철웅같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신에게 귀의하면 천국을 가고, 박철웅 손에 죽은 3명은 신에 귀의하지 않아서 그리 지옥같이 죽었다는 거냐?'는 식의 비아냥은 논란의 핵심을 묘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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