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원조는 이두창(李頭昌)으로 신라의 우장군으로 지략이 뛰어나 옥저(沃沮)로 하여금 양마 200필을 헌납하게 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어 후손 이공정(李公靖)을 시조로 하고 있다.
우봉이씨(牛峰李氏)의 시조 이공정(李公靖)은 시호가 문경(文景)으로, 고려 때 사람이다. 이공정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 · 잠성(岑城) 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하였다. 그의 아들 이자성(李子晟)은 고려시대의 인물로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몽골 침략을 막아내는 공을 세웠고 각종 반란을 진압하였다.
일제시대의 정치인 이완용이 1925년에 경기도 장단군에서 시조묘인 이공정의 묘를 찾아내 크게 개축한 일이 있다. 이병도(丙燾)는 일제시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서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조선사 편수회에 있으면서 한국사를 왜곡하였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였고 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처남이며, 서울대학교 교수 이장무·이건무는 그의 손자이다.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용(用) | 구(九) | 병(丙) | 녕(寧) | 무(茂) | 범(範) | 강(康) | 재(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