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준(金晙)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병부(兵部)· 예부(禮部)·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정신공(貞愼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장남(長男) '김지선'(金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지내고 설성 김씨로 분적하였다. 김지선(金之宣)의 아들 김원(金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고 문원공(文元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차남(次男) 김지경(金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다.
개성 김씨(開城 金氏)는 의성 김씨에서 분적하였다. 의성 김씨 시조 '김석'(金錫)의 9세손 김용주(金龍珠)는 고려 문종 8년(1054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고, 개성부사(開城府使),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들이 개성(開城)으로 분관(分貫)하였다.
개성 김씨(開城 金氏)는 600여년 전 고려가 망하고, 이씨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려의 왕족인 왕씨 일가를 섬멸시키는 과정에, 송도(개성)에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시동리 삼은 마을으로 피난하여 생활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개너머 시동 4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너무 광활하고, 방어 할 수 있는 은신처와 망을 볼 수 있는 산이 없어서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져 있고 협소하여 방어도 쉽고 뒤에 뾰족한 산이 있어 사주 경계도 가능한 삼은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삼은 마을이란 동은(동쪽으로 잠깐 거쳐간다, 은신했다 가다), 서은, 하은을 말하는데 동네에선 동거른다리, 서거른다리, 아랫거른다리 라고 보통 부르고 있다. 망덕산은 동은 마을 뒷산에 아주 뾰족하게 생긴 산인데 이곳에 올라가 노심초사하여 항상 망을 보며 살았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개성을 향해 망향제를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산을 고려가 망했으니 패망산이라고 했다가 개성이 그리워서 개성에 있는 산 이름인 덕물산이라고 했다가 어느 날 소승이 와서 자고 가면서 '망덕산이라고 하십시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망덕산(望德山)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고려 왕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왕씨라고하면 죽으니까 본관을 개성에서 왔기 때문에 개성 김씨로 본관을 만들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은 개성 김씨 또는 왕 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일대의 땅과 산이 거의 개성 김씨의 소유였었는데 이들이 다 망하여 외지로 가고 일부 산에 묘소만 많이 남아 있는데 개성 김씨의 종손 김수혁(경기도 청운명 도원리 풀무산)이 경향 각지의 종친들의 의견을 모아 조상들의 위패 봉안실을 망덕산 입구에 돔식으로 굴을 파서 15평 남짓한 곳에 "개성 김씨 위패 봉안실"이라고 써 붙여 놓은 시설을 하였다. 그리고 가을에 시제를 모시고 있는데, 이곳이 개성 김씨의 발상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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