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고려 삼한벽상공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문다성은 갓난 아기 때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의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남평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대종회에서는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탄생은 고려 개국공신이라는 족보 기록과 맞지 않아 통일신라 말기로 정정하였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1731년 장흥 월천서원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에서 문익(文翼)을 1세조로 하였고 이후 최초의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인 문익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 문익(文翼)은 1098년(숙종 3) 좌찬선대부·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遼)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경절(敬節)이다.
문익의 아들인 문공인(文公仁)과 문공유(文公裕)가 문과에 급제하여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와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고,손자 문극겸(文克謙)은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다.
남평 문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8명을 배출하였다.
문성공파, 충혜공파, 헌납공파, 순질공파, 의안공파, 시중공파, 성숙공파, 감천군파, 남제공파, 순평군파, 충익공파 ,판도판서공파로 나뉘어 있다.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호(鎬) |
제(濟) |
식(植) |
희(熙) |
주(周) |
종(鍾) |
영(泳) |
동(東) |
노(魯) |
재(在) |
42세 |
43세 |
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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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銑) |
택(澤) |
표(杓) |
2020/01/19 - [멀티미디어/연예인 모델 사진 화보] - 남평 문씨 연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