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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변순(邉順)이 1268년(원종 9)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심양(瀋陽)의 장수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다.

변순의 손자 변안렬(邉安烈)은 원나라 심양(瀋陽) 사람으로 원나라 말기에 공민왕(恭愍王)과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왔다. 1351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1361년(공민왕 10)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켜, 2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는 개성(開城)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녕(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1388년(우왕 14)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 시키려다가 김저(金佇)와 함께 죽었다. 그는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原州)에 정착하였다.

변안렬의 첫째 아들 변현(邉顯,1356년생)은 1382년(우왕(禑王) 8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통훈대부 관봉상시사에 이르렀다. 아들은 극충(克忠)과 극민(克愍)이다.

변안렬의 둘째 아들 변이(邉頤,1360년 ~ 1439년)는 젊어서부터 풍채가 우뚝하고 기절이 높아 경제(經濟)의 뜻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세상을 진취 할 뜻을 없었다. 태조(太祖)가 등극하여 여러 번 벼슬을 내렸는데 변이는 한사코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해 주지 않았다. 1411년(태종 11)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고 원종공신(元從功臣)에 1등으로 책록되어 전지(田地) 30결과 노비 30구를 하사 받는 등의 총애를 받았다. 남원부사(南原府使), 원주목사(原州牧使), 강계부윤(江界府尹)을 역임하였는데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자신을 규율하였으므로 다스린 곳마다 구비(口碑)가 전해졌다. 1420년(세종 2)에 전라도병마수군도절제사(兵馬水軍都節制使)로 임명되었고, 1422년에 충청도수군도안무처치사(忠淸道水軍都安撫處置使)로 전보되었다. 내직으로 들어가 중군총제(中軍摠制)가 되었으며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진하사(進賀使)인 권희달(權希達)의 죄상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첩을 회수 당했으며 부처하기를 자원하였다. 이듬해에 직첩을 되돌려 받아 좌군총제(左軍摠制)로 전보되었다. 1439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고,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다. 자식은 7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변차희(邉次熹)는 첨지중추(僉知中樞), 변상조(邉尙朝)는 남부령(南部令), 변상근(邉尙覲)은 영중추호군, 변상회(邉尙會)는 예조참판(禮曹參判), 변상동(邉尙同)은 감찰(監察), 변상빙(邉尙聘)은 간성군수(杆城郡守), 변상복(邉尙服)은 덕천군주(德川郡主)에게 장가들어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딸은 공신 정유길, 개성유수 이점, 좌찬성 이승손에게 출가하였다.

변안렬의 셋째 아들 변예(邉預,1363년 ~ 1417년) 통훈대부 고려 우왕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 절도사 상호군 판훈련원사를 지냈다. 아들은 영청(永淸)과 세청(世淸)이다.

분파

『원주변씨족보(原州邉氏族譜)』에 의하면 중국 송(宋)나라 말에 고려 황주(黃州)에 귀화한 변요(邉)의 아들 변려(邉呂)가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졌다. 변려(邉呂)는 황주 변씨의 시조이기 때문에 원주 변씨는 황주 변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별좌공파(別坐公派)

극충(克忠)은 별좌공파祖이다.

참의공파(參議公派)

극민(克愍)은 참의공파祖이다.

첨추공파(僉樞公派)

차희(次熹,1392~1462)는 첨추공파祖이다. 子 회문, 조선조 세종때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남부령공파(南部令公派)

상조(尙朝)는 남부령공파祖이다. 조선조 세조때 남부령을 지냈다.

호군공파(護軍公派)

상근(尙覲)은 호군공파祖이다. 조선조 세종때 선절장군 군기판관을 지냈다.

참판공파(參判公派)

상회(尙會,1399~1485)는 참판공파祖이다. 호 무송, 호조․예조참판 증예조판서 겸 예무관제학 지 경연춘추관사 원평군에 봉했다. 1399년(정종 1)∼1485년(성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무송당(撫松堂). 외조부는 남좌시(南佐時)이고, 처부는 유이생(柳易生)과 김관(金灌)이다. 1417년(태종 17)에 정유식년사마시(丁酉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에 갑인알성문과(甲寅謁聖文科)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예조‧병조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令), 승문원사(承文院事), 군자(軍資) 선공판사(繕工判事) 등을 역임했다. 외직으로 함주‧양주‧원주의 수령을 지내면서 공적을 인정받아 내직으로 돌아와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재직 중에 참소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문신임에도 무술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활쏘기의 달인으로 유명했고, 또 풍류를 즐기며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삼가면서 명리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가(特加)하면서 호조참판(戶曹參判)과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을 행했을 때, 왕이 친히 여러 원로대신에게 술잔을 돌렸는데 변상회도 검참판(檢參判)의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예문관제학지경연춘추관사(藝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事) 원평군(平原君)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남양주(南楊州) 별내면(別內面) 광전리에 있다.

감찰공파(監察公派)

상동(尙同,1400생)은 감찰공파祖이다. 조선조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군수공파(郡守公派)

상빙(尙聘)은 군수공파祖이다. 세종조에 행대감찰로서 홍원숙과 같이 옭고 그른일을 살피는 일로 경기 좌우도보사직이 되고 원종공신삼등에 녹훈 통정대부 간성군수를 역임하였다.

부마공파(駙馬公派)

상복(尙服)은 부마공파祖이다. 호는 송헌(松軒), 조선조 통정대부 강릉대도호부사, 원천위의 부마, 조선 전기의 문신, 부인은 정종의 딸 덕천옹주이며 덕천군주(德川郡主)로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책록되었다. 1455년(세조 1)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재임 중에 사망했다. 이에 세조는 호조(戶曹)에 전지를 내려 관직에 있으면서 사망하였으니, 미두(米豆) 각 10석과 종이 60권을 부의(賻儀)하였고 아울러 관곽(棺槨)도 내렸다. 묘는 남양주(南陽州) 진건면(眞乾面) 용정리에 있다.

사용공파(司勇公派)

영청(永淸)은 사용공파祖이다.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세청(世淸)은 중랑장공파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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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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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2 - [멀티미디어/연예인 모델 사진 화보] - 변씨 연예인

 

변씨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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