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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후진국인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까지 축출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많은 이유가 존재했다그중에서도 백제와 고구려를 능가하는 외교력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결정판이 바로 당과의 외교를 통한 나당연합의 결성이다.

6세기 중반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많은 이점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수확은 중국과의 외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것이다당시 중국은 당이라는 거대한 통일 왕조가 존재하였으므로 비단 신라뿐만이 아니라 삼국 모두에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반도의 끝자락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당과의 외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 이였다그러나 한강유역 점령으로 인해 이 어려움을 단번에 극복하고 당과의 외교에서 삼국 중 가장 우위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훗날 나당연합 결성의 밑거름을 다지게 된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유역의 점령으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 양국에게 심한 압박을 받게 되고 결국 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존립자체까지 위협받기에 이른다바로 이때 신라가 생각한 돌파구가 당과의 외교를 통한 군사적 동맹 강화였고 이를 성사시킨 이가 647년에 발생한 비담의 난을 제압하며 입지를 강화하고 있던 김춘추였다.

김춘추는 이후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자 화백회의에 의해 신라왕에 추대되니 이 사람이 백제를 멸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태종무열왕이다.

삼국통일 전 7세기 중반 삼국은 커다란 정치적 혼란 상태를 겪는다. 642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인한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백제에서는 641년과 657년 의자왕에 의한 대대적인 왕권강화정책이 시행되는데 왕족 41명에게 좌평직을 수여하는 등 파격적인 전제체제 구축으로 인해 귀족세력의 많은 반발을 사게 된다이는 곧 나당연합군의 침공에서 탁상공론으로 인해 때를 놓치게 되는 것이나 좌평 임자란 자가 신라 간첩에게 포섭되는 등 극심한 정치적 난맥상으로 드러나게 된다고구려 또한 연개소문의 생존 시에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오히려 당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 내는 등 어느 정도 단결된 모습을 보이나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결국 후계구도에서 밀린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이 당으로 자신의 세력과 함께 투항하여 당의 고구려 침략시에 앞장서는 매국행위를 행하게 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내분으로 자멸하게 된다반면 신라는 647년 발생한 비담의 난을 승리로 극복한 신흥 귀족 세력이 아직도 신라 정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잔존 구 귀족세력과의 관계를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삼국 중 유일하게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이는 앞에서 말했듯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때 왕위계승 다툼에서 구 귀족세력의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상대등 알천의 양보를 받아내 김춘추가 탈 없이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초 신라의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백관의 의복을 정하는 등 신라의 통치체제를 정립하였고 김해 지방에 존재하던 금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국가 경제는 물론 국력신장의 발전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이는 다음대인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나타나는데 562년 고령지방의 대가야의 병합으로 인한 낙동강 유역의 차지와 백제와의 연합으로 인한 한강 상류지역의 차지로 드러나게 된다신라는 이후에도 이에 그치지 않고 553년 백제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까지 침공하여 항강지역 전부를 독차지 하였으며 북쪽으로도 활발한 영토 확장을 하게 된다이는 곧 많은 물적 자원과 인재의 확보로 인한 국력신장으로 나타나게 되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촉발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결국 이러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에게 일통삼한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게 된다.

특히 553년 신라의 변심으로 인한 한강하류지역의 병합과 554년 발생된 관산성 전투에서의 백제 성왕의 죽음은 이후 백제와 신라 관계를 매우 악화시키는 계기가 된다결국 백제가 멸망하게 되는 66o년 까지 양국은 치열한 전쟁을 수도 없이 치루게 되며 서로 간에 매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이는 신라의 나당연합의 군사동맹 목표가 백제의 멸망이 우선이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백제의 대야성 함락으로 인해 사위 김품석과 딸을 잃은 김춘추의 개인적인 원한으로도 양국간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삼국 중 후진국이던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과의 활발한 저자세 외교를 통한 군사동맹과 백제와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과 맞물린 내부안정또한 6세기와 7세기에 걸친 비약적인 국력신장백제의 멸망을 우선적으로 정할만큼 뿌리 깊은 반 백제 성향과 일통삼한의 사상적 토대가 함께 맞물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우리는 많은 의의를 부여 할 수 있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민족사적인 면에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본래 삼국은 분리 되어 있음으로 인해 발생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적지 않았는데 이를 통일신라라는 단일 국가를 통해 융합하여 비로서 단일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또한 삼국간의 전쟁과 불필요한 경쟁으로 인해 소모되던 물적 인적 자원의 낭비를 해소함으로써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서로간의 문화와 기술을 하나로 공유함으로써 찬란한 통일신라 문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이는 고구려의 광대했던 영토의 상실과 백제의 왜에 대한 영향력 상실 등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또한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 들여 자주적이지 못한 통일 이였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신라는 삼국통일 후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의 남쪽 지역만을 점령함으로써 요동지방을 비롯한 고구려의 땅이던 대부분의 북방영토를 상실하게 된다비록 이후 고구려 유민이던 대조영이 발해를 세움으로써 고구려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긴 하나 이후 발해가 멸망함으로 인해 다시 북방영토가 중국에 복속됨으로써 우리 조상의 터전을 영영 회복할 수 없게 된다그러나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에 이른 활발한 북진정책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재의 모습만은 이루게 된다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을 당시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삼국통일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과 이 과장에서 당이라는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한계성이 있다그러나 이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유민과 합세하여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어느 정도 삼국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며 삼국통일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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