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마.
일제강점기의 이관규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한민국 이후로는 김대두가 최초이다. 2004년 유영철 사건 발생 전까지 3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은 살인범으로 기록됐다. 이판능이나 우범곤은 대량살인으로 분류되고 또한 정신이상자로 평가할 소지가 충분하기에 제외. 물론 제정신으로 사람을 5명, 6명 살해하거나 일가족을 몰살하는 범죄는 잊을 만하면 나왔지만 10명이 넘는 대량살인을 저지른 건 김대두가 처음이다.
1975년 전라도, 경기도, 서울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참고로 1975년이면 1982년에 일어난 우범곤 사건보다 7년 전이다.
폭력 전과 2범인 김대두는 출소 후 돈이 궁했고 돈을 빼앗기 위해 1975년 8월 12일 첫 살인을 저지르고 같은 해 10월 8일 검거되기 전까지 55일 동안 마구 돌아다니면서 17명을 살해했다. 특히 1975년 9월 25일부터 1975년 10월 2일까지 경기도의 외딴집을 주요 범행 대상으로 삼아서 1주일 사이에 1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소위 야수의 짓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첫 살인 후 순천행 기차를 탔다가 우연히 만난 교도소 동기와 같이 돌아다니며 두 번째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후 이렇게 된 바에야 돈이 많은 서울에서 살인을 저지르자고 의기투합한 둘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뒤 헤어졌다. 어쨌든 김대두는 계속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검거되기 하루 전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청년에게 접근해 공범을 제의하나, 그 청년이 자신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자 그 청년을 살해하고 그가 입고 있었던 청바지를 벗겨 가져갔다. 이때 어리석게도 피해자의 청바지가 피범벅이었음에도 청량리 역 근처의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소에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면서 김대두는 세탁소 주인에게 "친구랑 싸우다가 코피를 흘려서 그 코피가 바지에 묻었다."(...)라고 어설픈 변명을 하였다. 청바지에 묻은 피는 코피를 쏟았다고 하기엔 너무 많았고 결국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직원 하씨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에 잡힌 직후에 청바지에 묻은 피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진술을 바꾸었는데 처음엔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친구랑 싸우다가 피를 흘렸다고 주장했다가 이후에는 동네 뒷골목에서 불량배들에게 구타를 당해서 피를 흘렸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후에 당담사건 형사인 홍세호 형사랑 함께 중국집에서 같이 탕수육과 술을 먹다가 체념한 듯이 "형사님, 사실 한 놈을 깠습니다(죽였습니다)."라고 자백을 하면서 그동안 저질렀던 연쇄살인 행각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김대두의 진술로 공범도 체포되었다.
- 1975년 8월 13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에서 잠을 자고 있던 노부부를 습격하여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할머니에게 상해를 입힘. - 1975년 8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3명을 살해. - 1975년 9월 7일,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으로 올라와서 홀로 사는 60대 노인 1명을 살해. - 1975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시 송탄읍에서 할머니와 손자들을 습격하여 일가족 4명을 살해. - 1975년 9월 27일, 경기도 양주시 구리읍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3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상해를 입힘. - 1975년 9월 30일, 경기도 시흥시 남면에서 어머니와 생후 3개월 된 아기를 습격하여 2명을 살해. - 1975년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서 30대 부부를 습격하여 2명을 살해. - 1975년 10월 3일, 경기도 수원에서 골프장 캐디를 습격했으나 상해를 입히는 데에 그침. - 1975년 10월 7일, 서울시 강북구 방학동에서 공범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남성 1명을 살해. |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했으며, 검거 이틀 후 현장검증을 실시했는데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히죽 웃어대는 모습에 전 국민이 경악했다. 또한 범행 수법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저 외딴집에 사는 일가족만을 몰살하고 얼마 안 되는 돈을 빼앗아 가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단순 강도살인인데 중상류층을 주로 노리던 이전의 강도 살인자들과 달라서 경찰이 제때 못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표창원이 쓴 한국의 연쇄살인에서는 그가 배운 게 없어서 그저 자기가 살아온 삶과 유사한 곳에서의 강도살인의 형태로만 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옥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수천 명을 신자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진심이었는지 사형 판결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지금도 설왕설래가 있다. 같이 수감됐던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조금이나마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있었던 것 같더라는 얘기가 있기는 하다.
1심은 둘 다 사형. 그러나 2심에서는 김대두에게만 사형, 공범 김해운은 다수를 살해하긴 했지만 한 건만 가담했고 김대두의 반 강요로 이뤄진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대두는 공범이 사형을 면하자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죄질이 명백하고 다수가 살해된 사건의 주범은 판결 당해 혹은 다음 해 신속히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28일 바로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되기 직전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변호사도 감형을 청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연구는 30여 년 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잡힌 뒤에야 이뤄진다.
사형당하기 직전 전과자를 냉대하지 말 것과 잡범과 중범죄자, 초범과 재범을 분리 수감하여 초범이나 잡범이 범죄를 배우지 못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록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의 유언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