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 이씨의 시조 이총언(李悤言)은 신라 말에 벽진태수(碧珍太守)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나이 61세에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고,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다.
이총언의 아들 영(永)이 대제학과 지경산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고려사 기록
이총언(李悤言)은 기록에 그 족보가 나와 있지 않다. 신라 말에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했는데, 당시 도적 떼가 창궐하였으나 이총언이 성을 단단히 수리하고 굳게 지켰으므로 백성들은 그 덕분에 편안할 수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서로 힘을 합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설득하자, 이총언은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따라 적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영이 당시 나이가 열여덟이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또 이총언을 자기 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2) 229호를 더 내려주었으며, 충주(忠州)·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고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또한 친필 서한을 보내어 변함없는 굳은 신의를 표시하며,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변치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이총언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재물과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와 후백제가 필사적으로 다투는 틈바구니의 외로운 성으로 당당히 동남쪽에서 태조를 성원하였다. 태조 21년(938)에 죽으니 나이가 여든하나였다.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이다.
벽진이씨 대동보 발췌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공의 휘는 총언이니 곧 벽진 이씨의 시조이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보근데 왕순식부전에 이르기를 《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말에 벽진고을을 보전하는데. 이 때 도둑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을 입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하여 화난을 평정하자고 효유하니 총언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케 하였다. 영의 그때 나이 십팔세였는데 대광으로 삼아 사도란 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총언을 벽진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 이백이십구호를 더 주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이천이백석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양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태조이십이년무술(938)칠월임자일에 졸하니 향년이 팔십일세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과 여지승람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러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함에 이총언에게 명하여 벽진 옛 터를 진호케 하고 이웃고을 민세로서 식록케 하여 백자천손까지 종시일절의 맹서를 맺어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이총언이 벽진태수로서 오직 의연히 항복하지 아니하고 동남의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안연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자 하였으나 총언과는 옛부터 친한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도 또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케 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해서 벽진장군으로 삼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벽진이씨본원 역문
이총언이 공훈으로서 벽진에 봉해졌음으로 인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벽진이씨와 성주, 경산, 청송, 성산 이씨와의 관계에 관하여
벽진의 유래는 옛 성산가야국 에서 부터 본피현, 신안현, 벽진군, 경산부, 광평군, 경산부, 성주목, 경산부, 성주목, 성산현, 성주군으로 승격 또는 강등, 개칭되어 왔다고 문헌에 나온다. 벽진이씨도 지명의 변화에 따라 잠시 성주이씨나 성산이씨로 불렀을 때가 있었다. (1월 9일자 이수호씨가 올린글에 대동보 272 페이지에 정헌선생 비문에 '성주이공 세근지묘'라 표시된 것은 성주이씨로 불릴 당시에 세운 비문이라고 이해시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파에 따라서 혹은 사는 집성촌에 따라서 명곡이씨(중국 천자가 산화선생이 계신 곳을 명곡으로 명명하여 하사), 산화이씨, 금산이씨(평정공이 사신 곳. 금릉의 고호), 견동이씨(감사공이 사신곳), 래진이씨(승원 자손들 집성촌), 명경이씨(문정공이 명경 급제함), 금릉이씨(금릉공 자손의 집성촌), 여은이씨(집성촌)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조 정조 이후에는 벽진이씨로 정립하여 일관되게 불렀다. 경산이씨와 청송이씨가 벽진이씨의 후손이라 함에 대하여는, 쳥송이씨는 경산이씨의 후손이라 되어있다.
경산이씨의 시조인 이덕부는 벽진이씨 시조의 장자인 이달행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었다. 경산 이씨의 구족보에는 위와 같이 벽진 장군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몇대손인지도 알 수 없고 다른 기록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도 없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최근 경산이씨 족보에는 벽진장군의 후손이라는 말은 넣지않고 있다. 참고로 성주에는 이씨성을 가진 본이 6본이 있다.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광평이씨, 경산이씨, 가리이씨 의 6본인데 성주 6리(李)라 부른다. 그 중에서 벽진이씨의 유래가 가장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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