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희종 4)에 시어사(侍御史), 1241년(고종 28)에 문하시중(門下侍中), 1271년(원종 12)에 통어사(統御史)를 역임하였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동안 1차 몽골의 난 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소실되었던 것을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고종 12년까지 30년간을 최고행정관으로 지내면서 재 각판을 지휘했으며, 총 경판수 8만 1258판에 달하는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각판하는 불사를 지휘하였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 영상(領三台事)에 올랐으며 항몽적인 세력이 정리되면서 벼슬에서 은퇴한 후 홍천군 북방면 장항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금학산에 용수사(龍遂寺)를 세워 중생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불도들의 수련도량으로 학서루(鶴棲樓)를 창건하여 경서(經署)와 시례(詩禮)를 강(講)의하셨으며, 다사(多士)와 준재(俊才)를 많이 육성하였다고 한다.[1]
3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진(震)○ |
○문(文) |
영(永)○ |
○식(植) |
환(煥)○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중(重) |
석(錫)○ |
○순(淳) |
상(相)○ |
○영(榮)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재(在)○ |
○진(鎭) |
연(演)○ |
○모(模) |
돈(燉)○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균(均) |
현(鉉)○ |
○원(源) |
병(秉)○ |
○섭(燮)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준(埻)○ |
○윤(鈗) |
완(浣)○ |
○주(珠) |
찬(燦)○ |
50세 |
5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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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坤) |
한(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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