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학기(金學起. 1414년~1488년)는 경순왕 후예로 조선 세조 6년 1460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그는 동문선(東文選) 편찬(編纂)에 참여(參與) 하였다.
부(父)는 직장(直長) 김만의(金萬義), 조부 중랑장(中郞將) 김득귀(金得貴), 증조부 도정(都正) 김해충(金海冲), 고조는 김구(金龜)이다.
장자(長子) 김길복(金吉福)은 진사(進士)이고, 손자 김우경(金禹卿)은 참봉(參奉)이며, 증손 김덕량(金德良)은 문과 합격 후 감찰(監察) 및 흡곡(歙谷)․덕천(德川) 현령(縣令)을 지냈다. 차자(次子)는 김길보(金吉輔)이고, 그의 아들 김자흥(金自興)은 경진년(庚辰年) 별과(別科) 때 솔개를 쏘아 명중하여 특별히 급제를 하사받았고 공과 같은 방(榜)의 급제(及第)로서 첨사(僉使)를 역임하였다.
일설에 시조가 김의손(金義孫)이라 한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무신으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진 청도 김씨(淸道 金氏) 시조 '김지대'(金之岱) 후손으로, 1414년 식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공주백(公州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부친은 세종 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호강공(胡剛公)김점(金漸)이다.
김의손(金義孫)의 아들 중 김여의(金麗義)·김일동(金逸東)·김응동(金應東)은 청도 김씨를 계승하고, 나머지는 김용(金龍), 김구(金龜), 김타(金妥)는 공주 김씨(公州 金氏)로 분적하여 공주파(公州派), 평양파(平壤派), 곽산파(郭山派) 파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중 평양파(平壤派) 파조 '김구'(金龜)의 현손이 김학기(金學起)인데, 그는 시조 '김의손'(金義孫)의 후손이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연대가 너무 가까워 계대가 맞지 않는다. 또한 《김씨 분관록》·《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文獻)에도 시조가 김학기(金學起)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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