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둘째아들인 김황(굉,나주김씨)의 맏아들로 그의 음덕을 입어 고려조로부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수작(授爵)받고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졌다.
시조의 아버지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름이 '김굉(金鍠)'으로 신라가 망하자 해인사에 들어가 입적하였는데, 입산하기 전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고려조에서 이들을 예우하여 장자 김운발(金雲發)은 나주군(羅州君)에, 차자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작금(昨今)에 와서는 시조의 아버지 이름을 '김굉'(金鍠)에서 '김황'(金湟)이라하고,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제수하였으나, 수작불수(授爵不受)하고 처자를 속세에 두고 입산위승(入山爲僧)하자, 고려 조정에서 그의 의행(懿行)을 높이 기려 '의영공'(懿英公)의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또 그는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공이 있는 신하여서 장지도 특별히 하사받아 개성군 성북 십리 밖 오룡산 기슭에 장사하였다고 한다(高麗 平章事 金湟~ 敬順王 第二子第四子以 國甥之子 有功之臣, 特賜葬地 城北十里之外 五龍山). 또 다른 문헌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왕자고(王子考)에는 마의태자의 아들로 기록 되어있다.
슬하에 중륜(重輪) · 성륜(聖輪) · 인륜(仁輪) 세아들을 두었고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묘는 경기도 개풍군 동면 종암산에 있다고 한다.
11세 김극순(金克淳)이 고려조에 안로현주(安老縣主)에 오르면서 비로소 고관대작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김극순(金克淳)의 현손 월당(月塘) 김대경(金臺卿)은 고려말 출사하여 1326년 문과 급제 후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이름을 올렸고,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安老縣)으로 유배되어 생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 김정준(金廷雋)은 태종때 동북면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 전주 부윤(全州 府尹)·중군 총제(中軍 摠制)를 역임하며 가문을 중흥시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
김경석(金景錫)과 김적(金適)은 을묘왜변때, 김충수(金忠守)는 임진왜란 때 무신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는 큰 공적을 세웠다. 김적(金適)과 김충수(金忠守)는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1315-5번지 소재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후손 김대경(金臺卿)은 호(號)가 월당(月塘)으로 고려조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는데, 안로현(安老縣)으로 유배 되어 후손들이 금성(錦城. 나주의 고호)에 살게되면서 본관(本貫)을 금성(錦城)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금성 김씨(錦城 金氏) 시조가 되었다. 무안(務安) 우산사(牛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후손 김인충(金仁忠)은 고려조에 강화진(江華鎭) 좌령낭장(左領郎將)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1403년경 제주시 [애월읍]]에 정착하여 후손(後孫)들이 그를 제주(濟州) 입도조( 入島祖)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나주 김씨에서 분적된 성씨로는 안로 김씨(安老 金氏), 교하 김씨(交河 金氏), 상음 김씨(霜陰金氏), 해주 김씨(海州 金氏)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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