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의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가유약(賈維鑰)을 시조로 삼는다.
시조 가유약(賈維鑰)은 명나라 병부상서 계요도찰사(薊遼都察使)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인 아들 가상(賈祥)과 병부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 가침(賈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와 소사(素沙), 남원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600년 부산 포구 전투에서 아들 가상과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
손자 가침이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울산 서생진(西生鎭) 도독동(都督洞)에 묻었다.
이후 가침은 조선에서 안동 권씨 권순의 딸과 혼인하여 울산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렸다.
후손들이 가유약의 출신지인 장쑤 성 쑤저우(소주, 蘇州)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침이 1647년(인조24) 죽은 뒤 가성(賈晟), 가호(賈昊), 가병(賈昺), 가수(賈遂) 네 아들이 충청도 태안으로 터를 옮겨 정착했다고 한다.
1851년(철종2)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숭의사(崇義祠)와 정문이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에 세워졌는데, 가씨들은 이후 태안을 중심으로 충효의 가통을 이어왔다.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口영(永) | 병(秉) | 口노(魯) 口섭(燮) |
재(在) 기(基) |
口현(鉉) 口진(鎭) |
순(淳) 한(漢) |
口희(羲) 口상(相) |
묵(默) 환(煥)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口규(圭) 口길(吉) |
종(鍾) 호(鎬) |
口구(求) 口양(洋) |
권(權) 화(和) |
口용(容) 口형(炯) |
균(均) 철(喆) |
口석(錫) 口용(鎔) |
수(洙) 택(澤)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
口주(柱) 口동(東) 口목(穆) |
희(熙) 엽(燁) 섭(烈) |
용(鏞) 철(鐵) 옥(鈺) |
口승(承) 口택(澤) 口해(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