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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신숭겸(申崇謙, 전라남도 곡성군 용산재,  ? ~ 927년 9월?)은 후삼국시대 태봉 말기 및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궁예의 부장이었으나 918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기여하였으며 927년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대신 전사하였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였다 한다. 원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 또는 능산(能山)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에 출중했다.

 

생애

고려 개국

초명은 삼능산(三能山)이다. 후에 태조 왕건으로부터 평산을 관향으로 하사받고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다.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하여 왕건의 집에 가서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왕으로 추대하였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고려의 태조로 세웠다.

전사

927년(왕건 10) 음력 9월 공산 동수 전투에서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갔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후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가계

  • 동생 : 능길(能吉)
    • 아들 : 보장(甫藏)
    • 딸 : 신씨(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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